외국희곡

데이비드 H 황 '까마귀를 쫓아서'

clint 2015. 10. 31. 17:07

 

 

 

 

아주 철없고 애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삶에 대한 깊이가 생겨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혜로워지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한다. 이 때문에 어떠한 일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지더라도 웬만한 것은 대비하고 대처할 수 있으며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레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여유를 가지고 사건을 마주볼 수 있게 된다. 살아갈 날보다 죽음의 문턱에 가까운 나이가 되면 어떨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삶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초연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나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둥글둥글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내공이 생겨서 말이다.
<까마귀를 쫓아서>의 창부인도 이런 것 같다. 그녀는 죽음에 가까운 나이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일 하염없이 앉아서 창밖을 보며 평온하게 삶을 살아간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집에서 10년 동안 가정부로 일해 온 60대의 흑인 여자인 한나라는 사람이 있다. 한나는 자신에게는 산드라라는 젊은 여자의 인격이 있다고 말하지만 창부인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어서 놀라지 않고 받아들인다. P.K(공공)라는 (계속 같은 말을 하고 무언가를 잘 기억 못하고 잊는 걸로 봐서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자신의 남편에게 산드라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자신을 죽음으로 데려가는 귀신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P.K와 손주 등 할 일이 아직 많다며 죽음과 싸워 이길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산드라가 나타나고 그녀는 창부인에게 그녀가 매일 창밖으로 보는 것이 창부인을 기다리는, 죽음을 암시하는 까마귀였음을 알려준다. 그녀는 그제야 일어나 까마귀를 쫓아 나선다. 그녀가 일어나서 나갈 때 산드라에서 한나로 돌아온 한나는 그녀를 죽음으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창부인이 앉았던 의자에 앉는다. 앉아서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웃으며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지혜롭다. 죽음을 마냥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말이다. 과연 지금의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있는 건 그에 대한 대답은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부인은 그리고 곧이어 한나는 이를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이 가진 연륜과 지혜를 가지고 말이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을 느낄 수 있을까. 글쎄. 아직 그걸 느끼기에는 필자의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안다. 죽음은 막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그래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은 죽음 앞에서는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어쩌랴. 피할 수 없으므로 죽음의 순간이 오면 더 행복하게 더 즐겁게 이를 받아들이고 당당하고 진지하게 이를 맞이할 수밖에. 시간이 지나 나에게도 그런 죽음의 순간이 온다면 창부인처럼 한나처럼 지혜롭게 그리고 극구 부인하며 난 그럴 수 없다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희곡의 마지막 부분의 한나 대사가 가장 와 닿는다. ?집에 오신 것 축하해요.?늘 집에서 머물렀던 창 부인이 까마귀를 본 뒤, 한나는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은 그녀가 도착하고 싶었던 그곳, 바로 집이다. 우리는 흔히들 죽음을 이야기 할 때 삶의 방황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걷는 길을 의미한다. 그리고 죽음을 대개 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창 부인은 삶을 그녀의 집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녀가 죽음에 빨리 갈 수 없었던 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황을 끝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녀의 하녀 한나이다. 첫 시작은 한나의 이중인격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한나는 60대의 모습과 40대 모습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40대의 모습은 산드라로 한나보다 더 젊고, 잘 꾸며져 있다. 그리고 한나처럼 갇혀있지 않고, 자기 할 말은 다 하는 개방적인 성격이다. 또한 창 부인의 하녀는 한나로 기억하기 때문에, 창 부인에게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 첫 시작이 한나가 자신의 이중인격을 고백하면서 시작되기 때문에, 곧 산드라의 등장에 관객은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산드라의 행동과 말투가 궁금하다. 그리고 산드라와 창 부인의 대화는 점차 창 부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작용을 한다.  중간에 등장하는 창 부인의 남편 P.K.는 창 부인의 삶을 더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 남편 P.K.는 치매를 앓고 있고, 창 부인은 이러한 남편 때문에 아직 자신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차 그녀의 죽음은 예고되고, 산드라 였던 한나는 다시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마지막의 한나에게도 창 부인이 똑같이 이야기 하는 집에 온 걸 축하한다는 걸로 볼 때, 한나 역시 죽음이 임박해있다는 것을 예고한다. 죽음이 차분히 들어온다는 면과 한나의 이중인격은 희곡의 흥미로운 요소로 작용한다. 그리고 까마귀가 주는 상징성, 집이라는 의미, 지금 보면 조금 진부하지만 나름 연극으로 본다면 조금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까마귀를 쫓아서는 사실적인 배경 속에 사실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죽음 혹은 재앙을 상징하는 까마귀를 등장인물들이 보인 인생의 마지막을 맞은 첫 부인이 그 까마귀를 쫓아간다는 결말로 상징주의를 결합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극의 내용은 현실적인 배경에서 사실적으로 일어나는 듯하면서도 결말은 상징적이고 신비한 느낌을 준다. 70대의 중국인 장부인은 무대 중앙의 커다란 의사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 남편 공공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과거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파출부인 60대의 흑인 여자 한나는 자신의 내면에 또 하나의 여자 산드라 스미스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 불우한 인생을 살아온 그녀는 변신을 거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의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살아 삶에 대한 지혜가 많은 장부인은 자기 삼촌의 예를 들여 사람에 따라 여러 인격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받아들인다. 한편 그녀는 동양적 사고로 산드라 스미스를 경고하는 신으로 해석한다. 무엇을 경고하는 귀신인가. 그것은 공공이 즉각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죽음으로 인도하는 귀신이다. 장부인은 공공에게 공공과 손자들을 돌봐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죽음과 싸워 이기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경고하는 귀신인 산드라가 나타나서 창부인이 허구한 날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창문턱의 까마귀이며, 둘다 그동안 죽음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일깨운다. 산드라가 인생을 결국 '까마귀를 쫓아 아이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가는 것'이란 이미 지로 암시하자 창부인은 까마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고 의자에서 일어나 까마귀를 쫓아 나선다. 그러자 그 의자엔 이번엔 한나가 앉아 창부인이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을 배웅한다. 그러나 장부인이 한나에게도 집에 온 것을 축하해" 라고 하는 걸로 보아 한나에게도 결국 죽음이 임박했음을 암시한다.

 

 

 

 

 

데이비드 헨리 황
1957년 LA에서 상하이 출신 은행원과 피아니스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탠포드대학을 거쳐 예일대 연극과에서 수학했다. 1988년 프랑스 외교관과 베이징 오페라 배우의 사랑을 그린 ‘M. 버터플라이’가 유진 오닐 시어터에 올려져 토니상 최우수 연극상을 수상했고,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중국 가족 이야기를 그린 리바이벌 ‘플라워드럼송’을 개작했으며, 2007년 ‘미스 사이공’의 캐스팅을 비꼰 자전적 연극 ‘옐로 페이스’를 퍼블릭시어터에 올렸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아이다’와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가사를 썼다. 이외에도 영화, TV 등 다양한 장르에서 일했다. 올 10월 롱에이커시어터에서 개막된 ‘칭글리시’에 이어 현재 이소룡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브루스 리: 서부로의 여정(Bruce Lee: Journey to the West)’을 집필 중이다. ‘M. 버터플라이’에서 대역을 맡았던 배우 캐슬린 레잉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케빈 클라인과 피비 케이츠 부부가 살았던 맨해튼 링컨센터 인근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