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홍창수 '도라지꽃'

clint 2015. 10. 28. 21:44

 

 

 

 

 

 

작가 홍창수는 우리나라 전통 연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작가이다. 탈춤의 연행원리를 형식적 기반으로 하면서 판소리 〈변강쇠가〉의 내용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흥겨운 분위기를 창출했던 〈아으 다롱디리〉는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작가의 관심은 판소리의 장르미학을 연극적으로 현실화한 〈도라지꽃〉에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이 작품은 1999년에 발표한 〈오봉산 불지르 다〉의 뼈대를 기본 모티프로 삼고 있어 얼핏 개작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으나, '오봉산 설화'의 맥락만 유지할 뿐, 형식과 내용 면에서 그 변화가 상당하기 때문에 거의 새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 은 판소리를 희곡으로 안착시켰다는 점이기에 〈도라지꽃〉의 형식적 특징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판소리는 창을 부르는 광대가 고수의 북소리 장단에 맞춰 레파토리를 구연하는 공연예술로 - 혼자서 여러 배역을 소화하는 광대의 연기와 다양한 장단에 어울리는 창의 숙련 정도를 향유하는 것이 목적이다. 즉, 창이라는 음악과 광대라는 1인 다 역의 배우가판소리의 필수공연 조건이다. 광대 혼자서 여러 역을 소화한다는 점에서 판소리는 연극으로 자주 변용되었는데, 1970년대 오태석이〈약장수〉와 〈춘풍의 처〉등을 통해 판소리의 연극성을 선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이후 극단 미추에서 손진책이 진두지휘한 마당놀이는 판소리의 레파토리를 현대화한 것은 물론 인물들의 중요 대사들을 모두 창을 통해 표현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판소리는 전통적 장단과 대사법의 운율을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도라지꽃〉은 판소리의 장단을 활용하여 대사의 운율을 살려내는 것은 물론 희곡이라는 문학 장르에 걸맞은 캐릭터의 형성과 사건 진행을 보여 준다. 우선, 작품 전체를 광대가 주도하는 판소리의 얼개는 도창자라는 캐릭터로 탄생하였다. 도창자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사건을 진행 시키고 인물들의 갈등을 중간자적 위치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사건의 마무리까지 책임을 지고 있다. 홉사 서사극의 해설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도창자는, 작품 전체를 꿰뚫고 있는 전지적 인물이자, 사건 전개의 완급을 조절하는 주도권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도창자가 사건을 전달할 때 주로 창을 활용하는 모습은 이 작품의 핵심이 판소리임을 확인하는 부분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영창을 소개하는 작품의 첫 장면에서는 도창자는 중모리 장단으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유도하고 있으며, 유통마켓으로 인해 영창의 슈퍼가 문을 닫는 상황 설명과 영창 어머니의 유언 역시 도창자의 창을 통해서 진행된다. 필요에 따라 사건 진행을 축약하기도 하고 때론 인물의 감성을 펼쳐내기도 하는 도창자는 판소리 광대의 희곡적 결합의 결과에 해당 한다. 작품 전체를 쥐락펴락하고 있으나 결코 도창자는 주인공이 아니다. 즉, 사건의 핵심을 구성하고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하기보다는 그저 주인공을 바라보고 주인공의 상태와 심리를 창으로, 대사로 설명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판소리 광대가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혼자서 연기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판소리가 설명 중심이라면 희곡은 캐릭터와 그들의 갈등을 바탕으로 하는 바, 결코 주인공으로 나서지 않은 도창자는 판소리가 희곡이라는 문학 장르와 효과적으로 결합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존재이다. 더구나, 도창자는 해설자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영창의 아버지로 역할 변화를 하는데, 이러한 역할놀이는 희곡의 장르 관습을 따르고 있음에도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는 판소리 광대의 연기법이 담지하고 있는 놀이와 경제성의 효과를 간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도창자는 판소리를 연극 무대로 끌고 들어온 여러 작품들 중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복합적 기능을 갖고 있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도라지꽃〉은 전반적인 내용이 그다지 밝지 않음에도 시종일관 경쾌하고 흥겹다. 그것은 무래도 판소리 창의 운율에 기반 한 3.4조 혹은 4.4조의 리듬 있는 대사와 판소리 특유의 언어유희에 기인한다. 영창이 슈퍼를 차리고 장사하는 모습을 매우 경쾌한 중중모리 창으로 풀어내어 생활에 대한 의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고 도창자와 영창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사들은 초라한 영창 아버지의 장례식장과 대비를 이루어 비극적 정서를 나름대로 객관화하고 있다. 억울한 죽음과 비극적 삶이라는 무거 운 주제와 내용을 굵은 선으로 묵직하게 풀어내기보다는 창의 장단과 리듬을 빌어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는 삶의 단순한 논리를 긍정적이고 쾌활하게 보여 주고 있다 판소리의 정서에 기반을 둔 이러한 작품의 전반적 경쾌함은 〈도라지꽃〉의 주제의식을 예각 화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도라지꽃〉은 우리의 전래 설화인 '오봉산 설화'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봉산 설화'란 문둥병에 걸린 남편과 이별한 아내가 남편을 다시 만나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를 쓰는데 우연히 만난 한 스님이 그 방법을 알려준 바, 100일 이내에 오봉산에 불을 질러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오봉산을 찾았으나 찾지 못한 아내는 100일 째에 서산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손을 내밀다가 오봉산이 자신의 손임을 알아채고 불을 질렀고 그 덕분에 남편과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이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을 때 그것을 다시 찾는 방법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과, 그 소중한 것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는 설화이다. 전래의 이야기를 창으로 풀어낸다는 것은 판소리의 형성원리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지만, 이 작품은 그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지금의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의 이야기를 그 속에 중요한 사건으로 엮어내고 있다. 즉, 전래 설화와 현실 이야기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판소리의 가창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문제 삼고 있는 현실의 문제는 대기업의 횡포와 그로 인해 파멸해가는 소시민의 일상이다. 주인공인 영창은 어렵게 모은 돈으로 동네에 조그만 슈퍼를 연다. 처음에는 장사가 그럭저럭 되어서 가족들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되는데, 어느날 영창슈퍼 옆에 대기업인 유통 상사의 기업 형 슈퍼마켓이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규모와 가격 면에서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원가 이하의 세일판매를 해도 영창슈퍼는 운영난에 허덕이게 되고 결국은 문을 닫는다. 이 과정에서 화병을 얻은 아버지가 죽게 되자 장례식을 치르게 되는데,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영창을 파산하게 만든 유통 상사의 대표 유통화의 장례도 함께 치르게 된다. 이에 자신의 불행을 온통 유통화에게만 돌리던 영창은 살아서 가난했던 아버지를 저승에서나마 화려 하고 복된 삶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와 유통화의 시신을 바꿔치기 한다. 이때부터 유통화의 영혼은 저승사자의 눈을 피해 영창을 찾아다닌다. 아버지처럼 화장해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좇아, 아버지 무덤에 어머니를 합장하려는 찰나 경비원에게 들키고 원혼이 된 영창의 부모는 서로를 찾아다니지만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설화의 논리가 개입하는 시점은 이 대목부터다. 부모를 만나게 하는 방법이 바로 오봉산을 찾아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영창은 결국 설화의 내용대로 지신의 손이 오봉산임을 알게 되어 직접 불을 지름으로써 부모는 서로 조우하고 원한으로 영창을 찾아다니던 유통화도 저승으로 떠난다. 이승과 저승으로 구분되어 있는 작품의 공간에서, 이승의 사건은 영창이 기업 형 슈퍼마켓에 자신의 삶이 파괴되는 현실의 모순이 중심이 되고 영혼들이 지배하는 저승은 설화의 세계로 확장되었다. 이승과 저승의 연결고리인 영창은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의 소시민이기에, 그가 맞닥뜨린 현실의 문제점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이되어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혹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대기업의 횡포를 자각하게 된다. 또한 자신의 손에 불을 질러 영혼들을 위로한 영창의 행동과 원혼들의 화해는 현실의 모순을 넘어서 인간이 견지해야만 하는 근원적 삶의 태도와 자세에 대한 의식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윤창출을 위해서라면 골목상권조차 먹성 좋게 집어삼키는 자본과 대기업의 생리, 그리고 그것에 의해 파괴된 소시민의 삶과 일상은 무한경쟁시대로 치닫는 현재의 모습 그 자체인 셈이다. 자신의 손을 불 태우는, 즉 소중한 것을 내어주며 화해와 상생(相生)의 결과를 끌어낸 영창의 행동은 첨예하게 대립하여 극단적 사회 문제들을 야기하는 다양한 갈등들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의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영창 개인에게는 극단으로 치닫는 불행한 사건의 연속이지만 그것을 표현 해내는 판소리 장단은 작품의 분위기를 경쾌하게 만들어내어 상대적으로 비극적 정서를 약화시키고 있다. 특히 주요 장면마다 관객들에게 들리는 창은 관객들이 작품 속에 완전히 몰입되는 것을 차단하여 영창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만들며, 인물들이 창출하는 언어유희의 유쾌함은 현실의 첨예한 모순을 긍정으로 품어내는 풍자의 효과를 경험하게 한다. 즉, 판소리에 내재된 의뭉스럽고 능청맞은 풍자의 정서가 날카로운 현실의 모순 을 아프지 않게 자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도라지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영창의 손에 붙었던 불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난 도라지꽃은 근처로 번져 곳곳에서 피어난다. 우리의 산과 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도라지꽃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을 상징한다. 거대하게 우뚝 솟은 한 그루의 나무는 안정적이고 든든한 듯 보이지만, 그 밑에 있는 작은 나무와 잡초 - 작은 꽃들을 죽이며 생존한다. 대기업이 존재하는 방식이 바로 이 큰 나무와 같다. 대기업에 소속된 직원들의 생계 운운하며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자본의 논리는 자신의 힘으로 혹은 미력한 자본으로 삶을 영위하려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폭력과 횡포가 되어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다. 〈도라지꽃〉에서 나무가 아닌 도라지꽃을 선택한 것은 한 그루 나무를 살리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나무 대신에 여기저기서 피어난 하얀색과 보라색의 도라지꽃은 보다 다채롭고 풍요로운 그림을 만들어낸다.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꽃이지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지만, 그 꽃들이 한데 어울려 그려내는 평화로운 풍경은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만들어내는 풍경보다 따스하고 친근하며 아름답다 도라지꽃이 만개한 들판, 이는 곧 보통의 소시민들이 행복하고 즐겁게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모습인 것이다. 판소리의 연행 양식을 차용하고 전래의 설화를 기본 모티프로 삼으면서도 우리 삶과 직결된 현실의 모순을 풍자로 품어내고 있는 〈도라지꽃〉은 점점 공허한 구호가 되어가고 있는 '상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새삼 주목하여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착한 의도처럼 우리네 삶도 도라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들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가의 글
이 작품은 1999년 공연 되어 호평을 받았던 〈오봉산 불 지르다〉를 새롭게 수정한 것이다. 〈도라지꽃〉은 지난 공연의 얼개를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원작과는 사뭇 다른 형식의 접근을 꾀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새로운 양식들의 융합과 실험이다 원작의 창작시 의도했으나 실현시키지 못했던 전통 판소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전통 음악예술의 가치를 현대 연극 속에 녹여내는 것이다. 최근에는 젊은 판소리꾼들이 그룹을 만들어 이런 시도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작품을 썼던 10여 년 전만 해도 판소리와 연기를 원숙하게 해낼만한 배우들이 아주 귀한 터라 소위 대학로에서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여러 면에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이 작품은 최근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대형슈퍼마켓 문제를 극의 소재로 채택하여 동시대적 공감대를 형성하려 했다. 거대자본인 대형유통업체들이 전국에 거미줄 식 슈퍼마켓을 체인 운영하여 중소 상인을 길거리로 내몰고 벼랑 끝으로 내모는 모습을 보며 내 침묵은 오래 갔다. 거대자본의 소자본 잠식화 과연 2011년 우리 대한민국은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가? 세계로 나아가며 지구의 위기를 구원할 보편의 길을 담론화 하는 지금, 한쪽에서는 공룡의 무한한 식욕이 지구의 땅덩어리는커녕 대한민국의 영세상인의 손바닥만 한 구멍가게마저 잠식할 상황이다
〈도라지꽃〉은 우리 사회의 상생을 희망한다. 상식이 통하고 이성의 질서가 지배하고 양극적 갈등이 지양되고 타인을 배려하는 세상. 〈도라지꽃〉은 이런 세상을 지향하는 희극이다. 판소리의 창과 아니리, 음악적인 대사, 마임과 춤 등 다양한 시청각적 요소들을 활용하면서 극의 희극성과 대중성을 제고시키려 했다. 또한 우리 국악계의 보석 같은 젊은 판소리 광대들과, 헌신적으로 참여해준 많은 스텝들이 공동으로 창조한 작품이다. 극단 대표로서 이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들 모두 마음껏 웃고 즐기며 상생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홍창수 - 극작가. 고려대학교 문학 석사 및 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희곡집:『오봉산 불지르다』발간 (1999.8), 편저: 『한국 희곡 읽기의 새로움』(1999.9) 번역: 루이스 E. 캐트론 저 『희곡쓰기의 즐거움』(1999.4) 서연호/홍창수 공편: 『김우진 전집』 1,2,3 (2000.1), 제2희곡집 『수릉』발간 (2003.12) 극단 창 THEATRE WINDOWS 대표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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