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이재수의 난을 누이인 오돌또기의 입장에서의 시각으로 풀어보는 1983년 전국연극제 출품작이다. 천주교도와 일본세력, 제주도민등의 유혈사태로 번진 이 작품은 이 이재수의 난 자체가 현재 재평가 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아도 역사적인 사실에 너무 치중하였기에 연극적인 평가는 다소 떨어진다는 당시의 평가였다.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천주교도의 행패에 맞서 이재수와 오대현이 이끈 민란으로 700여명이 숨진 사건이다. 1858년 제주도에 가톨릭이 전래되기 시작하였고, 99년 프랑스의 페이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파견되면서 본격적인 전교가 이루어졌다. 그 뒤 1900년 라쿨, 무세 신부가 들어오면서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때 강봉헌이 제주도 봉세관으로 부임하면서 온갖 잡세를 부당하게 징수하였고, 이러한 일에 가톨릭교도들을 채용하였다. 또한 교회가 부지를 매입하면서 신목(神木), 신당(神堂)을 없애는 등 제주도민의 문화를 무시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도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다. 이에 대정군수(大靜郡守) 채구석과 유림(儒林) 오대현은 상무사 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봉세관과 교회에 대항하였다. 관노 이재수 등과 도민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입수한 무기로 무장하여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라쿨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함대에 도움을 청하여 6월 1일 제주에 도착했으나 이미 제주성은 함락되었고 가톨릭교도 500여 명이 처형당한 뒤였다. 그 후 정부에서 파견한 강화 진위대에 의해 진압, 채구석을 제외한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 등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나머지 주동자들은 징역에 처해졌다. 이 민란은 피살된 교인들의 매장지 문제, 프랑스 인 재산의 손해 배상 문제 등으로 3년 뒤에야 수습되었다.
이재수는 관노(官奴) 또는 마부였다고 한다. 1901년 대정군 (남제주군 대정읍) 인성리에서 주민과 천주교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주민 대표로 자진 참가하여 봉세관의 토색(討索)과 천주교도의 행패를 성토하고 고발하였다. 같은 해 5월 주민과 천주교도의 출돌로 민란이 일어나자 민군(民軍)의 주장(主將)이 되어 민란을 지휘하였다. 이재수는 정부군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교수형이 확정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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