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은 일본작가 오자끼 고요의 금색야차를 조중환이 번안하여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던 소설이다(1913년)
우리가 이수일과 심순애란 제목으로 더욱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리고 신 장한몽은 차범석씨가 신파극 으로 쓴 완전 창작극이다. 단지 제목만 신 장한몽일뿐이다. 그러므로 스토리 라인도 오리지날과는 전혀 다르다.. 어찌보면 더욱 비극적인게 신장한몽이리라.. 김중배의 다이아반지에 눈이 멀어 사랑을 버리고 간 순애.. 결국 천신만고끝에 돈을 번 수일과 재회하는 것이 장한몽이면 신 장한몽은 학창시절 영숙을 짝사랑하다가 요정에서 다시 만나는 서기웅.. 그리고 그런 과거사를 묻고 결혼을 하여 시집살이를 하는데 결국 화류계에 몸담았던 과거가 탄로가 나서 임신한 몸으로 시댁에서 쫓겨나게 된다.. 결국 아들을 친정에서 낳게되나 남편인 서기웅은 연락도 없고 어느날 시어머니와 올케가 쳐들어와서 서씨 가문의 장손이라며 애를 빼앗아 간다. 결국 시댁앞까지 애를 보기위해 찾아온 영숙은 남편을 만나나.... 예전에 사랑하던 그가 아니다.. 피곤하게 하지 말라는 기웅앞에 영숙의 동생인 영국이 나타나 칼로 복수를 한다.. 동생의 살인죄까지 뒤집어 쓴 영숙은 애기를 그리워하며 거의 실성하다시피 망가진다..
작가의 글 - 차범석
연극 "장한몽"은 1913년 극단 "혁신단"에서 공연했던 신파극이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저명한 자연주의 소설가 오자끼 고요의 원작소설인 "곤지끼 야샤 (金色夜叉)"를 조일제가 각색한 것으로 우리나라 신파극의 대명사처럼 평가되었고, 지금도 젊은 층에서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더 알려지고 있다. 원래 신파라는 말은 구파에 반기를 들고 나선 일본 연극의 한 형식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각과 봉건사회의 붕괴과정에서 일어난 자유 신장을 밑바닥에 깔았던 가정극이자 여성 취향의 비극을 지칭한 것으로 일본 연극의 근대화 운동을 촉진시킨 연극형식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신 연극운동이 일본의 신파극을 도입하고 모방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자연스럽고도 타당스러운 시대 조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로부터 80여 년의 세월이 흘러나오는 동안 신파연극은 한동안 우리 연극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연극을 예술운동으로 간주하여 일으켰던 신극운동은 오히려 뒷전에 물러서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6.25동란을 계기로 그 신파는 차츰 자취를 감추고 젊은 지성과 연극인들에 의한 동인제 극단이나 소극장 연극이 활기를 띠면서 신파극은 소멸하다시피하여 올드팬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추억거리요, 젊은 층에서는 막연한 소문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 연극계의 일각이나 대학가에서 신파극에 대한 호기심과 모방 충동으로 신파연극을 공연하게 되었다. 그것을 단순한 복고주의라기보다는 우리의 연극적 유산이니만큼 한번쯤 접근해보자는 의도에서 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년층 이상의 관객들은 젊은 관객들로부터 밀려나거나 소외된 상태에서 좀더 알기 쉽고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그런 대중적인 상업연극을 요구하는 자각증상도 나타나는 추세이다. 연극은 보고 즐기는 것이지 극장에까지 와서 심각한 철학 강의 같은 연극을 관람료를 내가면서 젊은이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볼 수는 없다고들 한다. 게다가 연기진도 성숙한 어른스러운 배우들이 하는 연극이 보고 싶지 설익었거나 현학적인 연극은 오히려 부담스럽게 여기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비록 상업주의 연극일지라도 안심하고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연극을 찾는 소리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파연극의 재현이 확인되었고 과연 신파극의 내용과 형식이 무엇인가를 모색함으로써 젊은 관객들에게 정확한 인식을 심어주자는 의도를 다짐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옛날에 있었던 신파를 그대로 복원한다기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사랑, 배반, 증오, 인고라는 보편적 극적 상황을 신파적 형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관객의 저변을 넓히자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목을 “신 장한몽"이라고 붙인 것도 趙一齊의 작품을 그대로 옮기려는데 있지 않고 제목을 빌려오되 내용은 오늘의 상황과도 일치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신파극 형식으로 표현하자는데 그 의도가 있다고 보겠다. 따라서 이 작품은 독창적인 시각에서 창작하였으되 왕년의 신파극의 특징을 살림으로써 연극 풍토의 확장에 그 의미를 부여한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특히 젊은 층에서는 신파연극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왜곡된 형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리고 있으며, 젊은 평론가들은 신파의 실체 파악도 제대로 못한 상황에서 신파를 운운한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의 하나이다. 한 마디로 신파는 진솔한 연극이다. 그러기에 왕년의 신파는 수많은 관객을 울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신파가 웃음거리의 대상으로 변질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이런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접근과 해명이 바로 이번 "신 장한몽"을 올리게 된 의도임을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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