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유진 오닐 '얼음장수의 왕림'

clint 2015. 11. 16. 17:56

 

 

 

 

 

 

 

오닐의 『얼음 장수의 왕림』에서 그가 계속해서 천착했던 인간실존의 문제를 극화하고 있다. 오닐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처참했던 기간이었던 1910년대 전반부에 자신이 기거했던 세 곳의 술집에서 알게 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극은 삶에 대한 그의 실존적 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작품이다.
오닐 평가에 있어 『얼음 장수의 왕림』는 매우 극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다. 12년간이나 미국 연극계를 떠나 있던 오닐을 1946년 다시 뉴욕에 나타나게 했던 이 극은 그 모호함과 지루한 사건 전개로 인해 초연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0년 후인 1956년 5월 다시 무대에 올려 졌을 때 565회의 장기 공연이라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결국 50년대 후반의 오닐에 대한 재평가에 큰 몫을 담당하게 된다. 사실 오닐도 이 극이 공연되기 전에 랭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 중인 미국인들에게 방어적 백일몽에 대한 연민이나 비극이란 정말이지 비애국적으로 비칠 것이어서 뉴욕 관객들이 이 극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물론 그도 전쟁이 끝나면 미국 관객들이 이 극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것이라는 예상을 덧붙이기는 했다.
그렇다면 그가 이처럼 관객들의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이 극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이 극에서 그처럼 절박하게 극화하려고 한 삶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1940년 초 맥고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 작품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극에 대한 내 직관을 설명하기란 어렵소. 아마 『얼음 장수의 왕림』이란 극이 내가 바라는 그 어떤 것. 그러니까 삶이 그 자체에 대해 완벽하고 심오하게, 그리고 입체적으로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최상일 듯하오... 배우들이 공연할 수 있는 극이냐의 여부는 내게 이차적이고 부수적이며, 전혀 중요하지 않소. 따라서 무대와 관객의 편의를 위해 온전한 삶의 일부라도 희생하는 것은 내게 큰 소실일 것이오.
오닐은 『얼음 장수의 왕림』에서 극 중 인물들을 각기 생의 가장 절박한 순간과 직면하도록 배치하고 있다. 그들은 이전 극에서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시, 공간적으로 확장된 여정의 행로를 밟지 않는다. 이전 극에서의 주인공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반복적으로 시도했던 외부로의 모험을 그들은 더 이상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거하는 세계인 해리(Harry Hope)의 술집은 시, 공간적으로 폐쇄된 것이며 어둠과 밝음, 밤과 낮, 과거와 현재 등 일체의 구별이 불가능한, “최악이 최상이고 동쪽이 서쪽이며 내일이 어제" 인 혼재의 세계다. 이곳에 기거하는 자들의 현재의 삶은 철저히 정지되고 차단되어 있다. 외부와의 접촉을 상실한 채 그들은 마치 자궁 속의 태아들처럼 웅크리고 있으며,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바깥 세계는 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현실로부터 철저한 도피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삶의 행태는 일차적으로 무력한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밀려난 채 마치 동면하는 동물들처럼 해리의 술집에 기거하는 그들은 자실들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현실을 철저히 외면한다. 그들은 현실과의 대면을 통한 그 어떤 변화나 발전도 거부하며 정체되고 폐쇄된 채 과거의 기억과 막연한 미래만을 꿈꾸며 진공 상태 같은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들이 기거하는 세계는 “고여 있는 유약한 생태계”나 다름없다.
이 극에서의 해리의 술집에 무리 없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페이먼이 지적하는 부조리극의 등장인물들의 특징, 그러니까 그들의 행위가 대단히 파편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대화 역시 상대방의 말에 좀처럼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대화 자체가 짧아지고 단순해지며, 결국 의사소통을 통한 사건의 진행이 가능하지 않다는 견해 역시 이 극에서의 등장인물들의 행동 양태를 적절히 짚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부조리극의 등장인물들의 삶의 행태 중의 하나인 시간 보내기의 특징적 행위들인 “말장난, 게임하기, 그리고 꾸며대기” 같이 행위들은 이 극의 등장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이다.

 

 

 

이 극에서 부조리 적 삶에 대한 오닐의 입장은 래리(Larry)와 히키(Hickey)의 대비를 통해 드러난다. 이 술집에 웅크린 채 살아가는 인물들 중에서 철정하게 현실에 등을 돌린 인물을 들자면 아마 래리일 것이다. 래리는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명징한 사유와 지극히 수동적인 행동이 특징적으로 드러나 있는 인물이다. 한때 무정부주의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자신의 과거 행적이 철저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미래에 대해서도 그 어떤 희망이나 기대를 걸지 않고 있다. 자유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참여했던 사회 개혁 운동으로부터 그가 발을 빼게 된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구원받기 위해서는 탐욕을 버려야함에도 불구하고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으며, 이상적인 자유 사회라는 “대리석 사원은 쓰레기 더미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에 대한 실망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이 참여했던 사회 운동이 좌절과 실망으로 끝난 “아름다운 몽상”이었음을 깨닫고 현실에서의 집착을 벗어 던진 채 삶을 관조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래리의 환상은 바로 자신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삶에 대한 그 어떤 애착이나 관심이 없다고 믿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환상은 이제 모두 과거의 일이며,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사람들과 의사소통 하려는 욕망조차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한다. 삶에 대해 냉소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래리는 그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어떤 종류의 행위로부터도 물러서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닐은 현실의 삶으로부터 도피해 들어온, 혹은 끊임없이 도피하려고 애쓰는 인물 래리를 통해 삶의 애매성에 당황하고 있는 실존적인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불확실성이란 특징을 지닌 삶의 실체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왜냐하면 이 극에서 래리라는 인물은 삶의 현장에서 의식적으로 물러나려고 하면서도 삶이란 과연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부단히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의 술집에 기거하는 다른 인물들이 모두 과거나 미래의 환상 속에 함몰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래리를 오직 현재에 머물러 있다. 현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는 불확실성과 애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삶의 현장에 개임하기를 주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래리의 이와 같은 태도는 바로 그의 또 다른 환상이다. 실제로 그 자신도 패릿(Parritt)과 히키와의 관계를 통해 이를 자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으면서 자신의 주변 상황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려는 시도가 바로 환상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관객들은 이 극에서 오닐이 래리의 행위를 묘사하는 지문인 “자신도 모르게”라는 대목을 자주 확인한다. 살아 있으면서, 또 동료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현장으로부터 물러서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큰 환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사르트르가 지적하고 있는 의식하는 존재인 인간의 운명, 그러니까 인간이란 이 세계 속에서 결코 편안해질 수 없으면서도 무엇에 대한 행위인 의식을 통해 거역할 수 없이 이 세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래리는 살아가는 과정에 희망이란 어디에도 없으며, 삶이 자신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자신이 죽을 때까지 모든 사물의 양면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아야만 처치임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삶의 행위에 대해 판단을 내림으로서 삶의 현장에 개입한다. 패릿의 행위에 격렬하게 반응을 보이는 대목에서 초연을 가장했던 그의 얼굴에 혐오감이 새겨지고 무미했던 그의 목소리를 경멸의 떨림이 끼여드는 것이다. 삶의 잔인함과 야비함, 그 불가해성과 애매성, 그리고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그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행위를 방해했으나, 결국 래리는 삶의 행위에 대해 판단을 내리며 개입한다.

 

 

 

자신의 말대로 모든 것의 양면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래리는 삶이란 오직 우주의 비정함과 인간의 한계성으로 인해 빚어지는 부조리함을 그 실체로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는 부조리한 삶에서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도록 남겨진 유일한 확실성이란 바로 살아있음과 그 종말인 죽음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행위임을 깨닫는다. 동시에 그는 삶이란 비록 그 부담이 너무 무거운 것이지만 환상에 의해 위안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극에서 래리와 대비되는 인물이 힉키다. 래리처럼 힉키도 환상을 버렸다고 주장하지만 환상에 대한 그의 입장은 래리의 그것과 다르다. 힉키는 친구들에게 환상을 버림으로써 자유로움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리고 그 환상을 버리는 방법이란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 즉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술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의 치료법이란 술의 도움을 받아 꾸려 가는 환상을 버림으로써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비로소 자신들의 실제 모습과 만나게 되며, 그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자신들의 죄의식이나 모멸감에서 벗어나 평화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히키가 말하는 도덕(회환과 죄의식)과 시간(내일)으로부터의 해방이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인 점은 분명하지만 실제 그의 친구들이 평정과 초월을 얻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하는 평정심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가 같은 평화 강매자 역할의 배후에는 자신이 주장하듯이 환상을 버린 후의 평정심이 아니라 또 다른 환상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 이블린(Evelyn)을 살해한 것이 사랑 때문이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내에게 더 이상의 배신의 고통을 주지 않고 영원한 평화를 느끼게 하기 위해 그녀를 죽였다고 우기지만 자신이 항상 아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 “넌 이제 그 환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알 거야, 빌어먹은 년!”을 통해서 그녀를 죽인 이유가 사랑이 아니라 증오였음이 드러난다. 실제로 그가 욕망과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삶의 진정한 평화를 인식했고 삶의 실체가 없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런 식의 자기 기만적 시위를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실체에 대한 두려움은 삶 그자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어서, 환상 속으로 숨어들지 않고서는 삶의 고통을 참아낼 수 없음을 히키는 보여준다. 그는 현재의 삶의 고통을 피하여 환상 속으로 도피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평화가 현실로부터 무의식적 도피에 의해 연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실을 수용함으로써 가능해졌다고 믿었다. 이런 그의 잘못된 인식은 동료들에게 오도된 현실론을 강요하는 잘못으로 이어진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진솔한 인식이 부여하는 덕목은 바로 그 부조리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타인들의 고통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심이다. 오닐이 힉키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우리가 부조리한 삶을 살아나가는 데 갖추어야 할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 바로 이동정심과 이해심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이 없는 세계에서의 구원의 불가능성”을 직시하고, “절망의 미학적 정당화”를 통해 확인 불능의 삶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인간에 대해 동정심을 견지하려 했던 오닐의 의도”를 관객들은 이 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빅스비의 지적대로 오닐이 이 극에서 말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삶의 애매성을 인식하고 그 삶을 수용할 줄 아는 인간의 책임이었다.


오닐은 이 극에서 삶의 애매성에 당황하고 희생되는 등장인물들의 처지를 힐난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가 확인했던 삶의 모습이란 불가해성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삶의 본질은 없음이었다. 이 극에서 환상을 버림으로써 극중 인물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평화가 아니라 이해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삶의 모습이었다. 인간은 그 애매성의 삶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수용하고 인정할 뿐이다. 래리의 말대로 “삶이란 너무 힘들어 죽은 날까지 모든 것의 양면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나약한 바보”가 바로 인간조건의 실상이자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 오닐의 인식이었던 것이다.

 

 

 

『얼음 장수의 왕림』은 다양한 상징적 요소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은 개별성을 벗어나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바로 인간 전체의 삶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잇는 시간이다. 플롯은 외형적 사건의 유기적 연결을 거부하고 인간의 실존적 조건들에 대한 심리적 반응들로 엮어져 있다. 실제로 무대 위에서 뚜렷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막이 오르기 전에 이미 사건은 끝났으며, 그들이 회상하는 과거만이 현재 속으로 투영되어 있다. 관객들은 그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삶이 하나의 거대한 기다림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 극에서 자주 반복되는 단어는 오히려 그 의미가 퇴색된다. 언어의 평가절하 현상이다. 환상을 버렸다는 주장은 오히려 환상 속에 침몰되어 있음을 시사하며 사랑이라는 단어는 증오를 의미한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역설적으로 행위에 의해 그 허구성을 드러낸다. 현실로부터 물러나 있다고 우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그 현실에 개입하고 끼어든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부조리한 삶의 모습을 기다림이라는 하나의 메타포로 무대 위에 재현해 낸 이 극은 그 주제와 양식에서 전통극과 결별하여 부조리극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극이라 하겠다. 히키는 열등감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이블린(Evelyn)을 살해하였지만, 그가 이블린의 완벽성과 비교되는 자신의 쓰라린 열등감 때문에 이블린을 살인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한다. 그는 자신이 저주스런 거짓의 허무한 공상을 포기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대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리란 그가 창조한 환상이다. 그것이 가난한 이블린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이었지만, 그녀를 죽여야 한다는 광적인 결론으로 그를 몰아세운다.
내러티브의 알레고리적이고 상징적인 층위는 아이러니컬하게 조작된다. 해리 호프 소유의 술집은 절망감과 침울함으로 시달린다.“ 그곳은 기회조차 없는 살롱이다. 바닥의 비천한 술집...”. 호프의 생일잔치는 죽음의 그늘로 오염되고, 희망의 사자(messenger) 히키는 죽음의 사자이자 고도(Godot)의 인간 얼음장수(iceman)로 판명된다. 더욱이 알레고리적이고 상징적인 내러티브 층위는 이 극의 강력한 성경의 인유들로 보완된다. 해리 호프의 술집은 허무한 공상들의 궁전이다. 아니면 내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기회조차 없는 살롱(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한 가족의 소우주, 인간의 세계 자체를 구성한다. 무대 위의 탁자들의 위치 선정과 생일 잔칫상은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아주 잘 암시해준다. 거기서 음료를 서로 서로 함께 마시며 축배 하는 사람들 모두는 친교(communion)의 은유이다. 지미(Jimmy)가 해고되고 그의 부정한 아내 마조리(Marjorie)로부터 이혼 당한 이유가 이 축배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가 마시는 축배는 인간의 친교에서 온전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암시한다. 그러자 히키가 구원자로 다가오지만 그는 배반자 유다로 판명된다. 패릿 또한 유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연극 안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가족이나 사회의 배반자로 드러난다. 이 극의 등장인물들은 이러 저러한 측면에서 모두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배반자이거나 그들이 믿었던 어떤 대의들의 배반자이다.

 

 

 

히키의 경우에 그는 이블린을 배신할 뿐만 아니라 호프의 가족 전체를 배반한다. 철물점 상인 히키는 해리 호프와 여러 건달들의 오랜 친구였고, 그는 주기적으로 열리는 파티에 일 년에 두 번 빠짐없이 찾아와서 그의 돈을 다 탕진해준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 자신들의 허망한 공상들을 제거할 것을 그가 요구한다. 해리의 세입자들은 그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가 정신 나간 영업 사원 자신인 휴고에게 죽음을 팔고 있다고 말하며, 세입자들이 빠져나갈 수없게 되었다고 강하게 저항한다. 래리는 한 때는 직업별 노동조합 무정부주의자였지만 무정부주의 운동의 배신자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것에 환멸감을 갖는다. 그는 그것을 경험했던 것이다―“지랄 같은 진리! 세계 역사가 입증하듯이 진리는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다. 그것은 무관계하고 실체가 없다. 역사의 대의에 대한 환멸 또는 그로부터의 소외는 감옥에 갇힌 패릿의 어머니 로사(Rosa)로부터의 소외감과 평행선을 달린다. 사실상 패릿이 래리에게 로사와 관련된 과거를 상기하는 자극적인 행동은 래리의 과거 경험을 역사 자체와 비교하는 문제 제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환멸 속에 인간과 그나 대의와 역사에 대한 근본적으로 사무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들 스스로로부터 구원받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러면 그들이 탐욕을 포기해야 하고 그들은 자유의 대가를 결코 지불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가족사의 골격 속에서 형상화된 패릿의 문제 제기는 연극의 심층 내러티브 안의 형상화 행위로서 공적이건 사적이건 역사와 관련한 극작가 자신의 문제 제기를 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