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미경 '그게 아닌데'

clint 2026. 6. 29. 04:52

 

 

어느 날, 동물원에서 코끼리가 탈출했다.

코끼리 때문에 아수라장이 된 거리.

결국 대통령 선거 유세장까지 쑥대밭으로 망쳐놓았다.

조련사는 비둘기와 거위 때문에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라 진술하지만

이를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형사는 잔인한 정치적음모라고 생각한다.

의사는 성행위 도착증에 걸린 환자의 환상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련사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을 풀어주는 걸 좋아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진술하며, 동물원에 취직한 것도 모든 동물을 풀어주기

위한 의도였다는, 다소 황당한 논리를 전개한다.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의사, 형사, 어머니 세 명의 논리에 점점 치쳐가고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달은 조련사는 진실을 얘기하기에

이르는데… 과연 코끼리 탈출의 배후에 누가 있을까?

 

 

 

2012년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월간 한국연극 공연 베스트7’,

‘동아연극상 작품상’, ‘대한민국 연극대상 대상’을 휩쓴 작품이다.

이미경 작가가 쓰고 극단 청우 김광보 연출이 무대에 올린 블랙코미디 연극이다.
2005년 서울 한복판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동물원 코끼리 탈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우리 사회의 심각한 '소통 부재'와 단절을 날카롭고 유쾌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코끼리 난동에 경찰은 당장 인명피해 운운하며 사살 방침부터 내놓았으나,

작가의 시선으로 본 코끼리의 거친 행동은 겁에 질린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는

한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계층, 집단의 단절 문제로 치환하여 블랙 코미디 극으로 풀어냈다.

코끼리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 상황을 놓고 조련사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의사, 형사, 조련사의 어머니 역시 각기 자기입장만 이야기 할 뿐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마음을 열고 상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소통과 대화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화’와 ‘소통’에서 소외되고 내몰린 사람들은 결국, 말이 통하지 않는 코끼리나 다름 없고

자신의 생각과 논리에 갇혀 보고 말하고 듣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들 역시 ‘무섭고

자신에게 위협적인 코끼리’로 보일 뿐이다.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공감과 고찰의 시간을 준다. '그게 아닌데…'라는 표현은 보통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아무리 바른 얘기를 해도 사회적 강자 또는 다수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힘없는 사람은 좌절하고 만다. 저항하고 항변하고 싶지만

워낙 저쪽에서 거세게 윽박지르면 나오던 말도 쑥 들어가 버리고 만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아닌데…"다. 그나마 그 말 자체도 차단당하기 일쑤다.

'그게 아닌데'는 그런 상황 속에 놓인 한 동물원의 조련사 얘기를 다룬 우화 같은 작품이다.

 

 

 

이 연극의 무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경찰서의 피의자 조사실. 형사는 이 사건이 단순한 코끼리의 난동이 아니라 치밀한 각본에 의해 조련사가 어떤 '몸통'으로부터 사주를 받아 대선후보의 유세를 방해한 '정치사건'으로 몰아간다. 피의자 인권보호를 자임한 의사는 조련사가 동물과의 성적 접촉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사람일 뿐 범죄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편다. 조련사의 동료 또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한다. 조련사는 느닷없이 성도착자가 되어버린다. 조련사를 면회하러 온 어머니 역시 엉뚱한 말로 사건을 꼬이게만 한다. "비둘기가 떼로 날자 거위가 꽥꽥대고, 그 소리에 놀라 코끼리가 달리기 시작했다"라는 조련사의 상황설명은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조련사는 그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소통을 이룰 수 없다. 다만, 어머니만은 어이없는 얘기 속에서도 사건 발생의 배경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하나 제공한다. 조련사는 어렸을 적부터 억압당하고 있는 동물이나 사람을 '풀어주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 어머니는 급기야 아들이 일을 저지른 것은 감옥에 가 죄수들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황당한 얘기까지 한다. 어머니의 이런 대사를 포함, 등장인물 각자가 막무가내로 자기주장만을 독백처럼 펼쳐내는 가운데 기지와 유머가 넘치는 대사들이 많이 있다. 부조리극 색채가 강하고, 소통부재라는 진지한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엉뚱한 대사와 장면이 웃음을 자극하면서 관극의 재미를 돋운다. 정치인·의사·학자·경찰의 그릇된 사고나 행동 관행을 조롱하는 풍자적인 내용도 대사 곳곳에 녹아 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블랙코미디다.

 

 

작가의 글 - 이미경
이 작품은 2005년도에 3장짜리 초고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정말로 어린이 대공원에서 코끼리 탈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경찰들은 인명피해가 우려되면 코끼리를 사살할 방침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TV을 통해 본 코끼리는 겁에 질린 채, 어쩔 줄을 몰라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었다. 낯선 공간에서 갈 곳을 잃어 두려워하는 그들이 코를 흔들 때마다 사람들은 위협으로만 받아들였다. 오해라고 할 수도, 오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 코끼리들의 흔들리는 동공이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길을 걷다가 코끼리에게 얻어맞아 병원에 실려가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이 사건은 쉽게 잊히지 않고 오랫동안 내 마음 언저리에 들어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뉴스를 보다가 불현듯 코끼리 사건이 겹쳐졌다. 코끼리와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주체만 바뀌었을 뿐, 모든 상황은 흡사했다. 소통할 수 없음에서 오는 오해와 답답함. 오로지 독백만이 난무하는 진술들. 일방적 결론이나 무력이 아니고서는 나지 않는 결론. 평행선에서 사건들의 인물들은 애초부터 만날 수도 없는 출발을 했고, 만날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결국 만나게 되는 기적도 일으키지 못했다. 
내가 조금만 감각을 세우면 너무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관계의 형태. 타자와 내가 포개질 수 없음에서 오는, 서로 다른 肉을 입어 하나가 될 수 없음에서 오는 어쩔 수 없음. 
그런데 더욱 슬픈건,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면 자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깨달음이다. 자신만이 옳다며 같은 모습만 복제하는 타자들의 틈속에선 당최 버틸 재간이 없다. 오로지 타자들의 독백 속에 압사당하는 것 외에는. 그들은 그 마지막 순간을 모면하려 안간힘을 쓴다. 탈출구를 찾는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로 탈출해버린 것처럼. 그렇게 조련사가 찾은 탈출구는.. 코끼리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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