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태석 '갈머리'

clint 2026. 6. 25. 12:42

 

 

극의 중심에는 6. 25사변의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그 기억을 현재화시켜 '50년 제자리 현실'을 강조하기 위한 연극적 방법은 

현장 검증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이다. 
사변 때의 살인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지노인이 50년 만에 출소하여 갈머리를 찾아오는데, 
순경들은 지노인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맹수들이 출현하던 50년 전의 산골을 
재현하고자 한다. 마을 사람들은 딸기 포장을 중단하고 50년 전처럼 모시 삼기를 하고, 
여러 동물 모양으로 변장하여 야생동물들이 지천이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재현한다. 
그러나 현장검증 과정에서 지노인에게 돌로 맞아 죽은 인물 역을 하던 서노인이 
먼저 돌로 쳐 지노인을 죽인다. '불복종 맹도견'이기 때문이며, 사변 때처럼 서로에 대한 
의심으로 인한 살인사건의 반복이다. 그러나 사변 때와 다르게, 마을사람들은 합심하여 
이 사건을 정당방위로 처리하고, 할멈은 두 시신을 거두어 3년 시묘를 지낸다.

 

 

 

<갈머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변화한 농촌의 현실과 풍속을 매우 실감나게, 
그러나 특유의 과장된 유머, 캐리커처, 만화적인 상상력과 비약을 통해 그리고 있다. 
이를테면, 제삿날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내놓았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한 끝에 농촌을 
떠나는 사람, 도시의 실직 아들 대신 손주를 키워주는 할멈, 경마에 손대는 노인들, 
카드빚을 갚기 위한 일환으로 맹도견 훈련을 받는 노인들, 농협 돈 끌어다 도시 관광객 
상대로 실장어나 악어 체험 관광 사업을 벌이는 등의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이 연극에서 오태석의 만화적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사례는 노인들이 '불복종 맹도견'이 
된다든지, 지노인이 암장된 시신을 찾아내는 개코를 갖게 되었다는 설정이다. 

 

 

 

오태석의 <갈머리>는 한국 현대사에 던지는 오태석 판 격정토로다. 갈머리는 동네 이름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 마을? 선암리나 지초시, 읍내 삼열이처럼, ‘갈머리는 오태석의 다른 작품에 수시로 등장해왔던 지명이다. 오태석은 갈머리를 지명으로만 쓰지도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번안하면서, 원수 집안의 당호(堂號)를 갈머리라고 이름 한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작품 도입부에 나오는 인간 맹도견 훈련 화소(話素)는 미발표 작 <불복종 맹도견>의 한 대목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이 작품은 이처럼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오태석의 작품 사()와도 맞물려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몇 겹으로 과거와 맞물린 이야기가 어떤 연유로 현대사에 던지는 격정토로가 될 수 있는가. 무대 위의 긴장감을 견인하는 인물은 수 십 년 전에 죽었다는 김승길이라는 인물인데, 그 김승길을 살해했다는 지수원이라는 인물이 수 십 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다. 그 살인은 6.25 동란의 와중에 저질러진 일이다.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오리무중이다. 개인 간의 마찰을 넘어서는 이념의 대립, 증오에서 증오로 이어진 민족상잔의 아픔이 그 살인의 배경을 이룬다고 어렴풋이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다. 이 살인은 우발적 다툼이 살인으로 발전한 경우다. 전쟁기간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은 우발적 시비가 살인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을 쉽게 제공한다. 작품 후반부를 관통하는 현장검증은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되는 수원지(水源池)로 기능한다. 50년 전의 상황을 정리하겠다는 취지로 현장검증이 이루어지는데, ‘현장 검증은 또 다른 살인 현장이 되고, 현장검증에서 벌어진 살인이 정당방위였음을 증명하기 위한 제2, 3의 현장검증이 일어난다.’ 과거의 맹목적인 증오가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반복될 소지가 많다는 통절한 이야기를 오태석은 이런 식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오태석 작가

 

이 공연에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이 다양한 모습을 하고 관객들을 찾아온다. 생일잔치에 쇠고기가 아니라 돼지고기를 냈다고 동네사람 무시하는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아 끝내 마을을 등질 수밖에 없게 된 어느 가족의 이야기, 시골노인들이 빚을 갚기 위해 맹인안내견 역할을 대신하는 개를 닮은 맹인안내인이 되고자 훈련받는 이야기, 악어라도 풀어다 관광촌을 만들어 소득수준을 높이자는 시도 등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낙후된 농촌 농촌의 주() 거주민인 노인문제의 통렬한 은유다  지수원을 환영한다며 마을 사람들이 벌이는 한판 축제도 무대미술의 빛나는 성취이다. 그때 그 시절 짐승이 모여 살던 산야(山野)를 재현한다며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로 여우로 토끼로 분장하고 무대 위를 가로 지른다. 동물 군() 마무리를 장식하는 공룡은 오태석 식 유머의 시각적 결정판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을 위하여 <갈머리>, 되살릴 것은 되살리고 버릴 것은 빨리 버리고, 고치고 다듬을 것은 어서어서 고치고 다듬자고 오태석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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