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학선, 이응률 공동작 '청산에 나빌레라'

clint 2026. 6. 24. 12:20

 

 

금강산의 사계를 씨줄로, 황진이가 만나는 남자들에 따라 

달라지는 의복을 날줄로 하여 전개된다. 

죽음을 앞둔 황진이가 마지막으로 금강산 유람을 떠나 낡은 의복에 
보퉁이 하나, 손에는 죽장 하나 쥐고 마치 저승길을 가듯 금강산에 오른다. 
금강산의 사계와 옷의 변화에 따라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죽은 총각, 벽계수, 지족선사, 
서화담 등과의 인연이 펼쳐진다. 또 자신과 6년여 동안 동거했던 예인 이사종과의 
안타까운 사랑도 그려진다. 그러나 모든 것을 떨치고 바람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처녀·중년·노년 3명의 황진이는 대미에서 함께 창하고 춤추며....

 


늙은 황진이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처녀· 중년· 노년 황진이가 3명이 등장하는 것은 나이별 차이도 있지만 전통 한복을 입는 
격식이 너무 복잡해 극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기획됐다고 한다. 
또 시와 노래, 춤 등에 모두 능한 만능 예인 황진이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각각에 능한 
배우를 통해 다면적인 황진이의 모습을 그려보자는 이유도 있다.



극단 연우무대(연출 정한룡)의 무대미학이 유감없이 발휘된 공연으로 한폭의 정갈한

풍경화에 비견할 만하다. 작품 소재는 우리에게 친숙한 조선의 여인 황진이의 삶이다.  
하지만 연출은 주인공의 기행(奇行)이나 미덕을 칭송 일변도로 극화하기보다 황진이와 
그 주위인물들과의 관계를 인간적이고 문화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켜 조명함으로써 
시대사와 인간 보편의 문제에 대한 관객들의 관조와 성찰을 끌어내고 있다.
막이 오르면 황진이가 굶주림에 지친 노구를 끌고 칼바람 부는 황량한 개골산에 등장한다.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노인에게 과거사를 들려주는 플래시백의 기법으로 극중 이야기는 
황진이의 어린 시절부터 전개된다. 그리하여 춘삼월 봄부터 시작하여 여름과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로 돌아올 때까지 네 단계의 인생역정은 자연스럽게 정류장식 드라마의 장면
단위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공간의 설정을 통해서 변전하는 인간 세상사의 이치를 
시각화하는 효과도 동시에 거두고 있다.

 

 


먼저 황진이의 계례를 담고 있는 봄의 금강산 장면에서는 봉건적 가부장 사회의 비인간적 

면모가 전경화되고, 여름의 봉래산과 가을의 풍악산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페르소나, 즉 사회적 가면이 서화담과 지족선사 등의 위선을 통하여 들춰내지면서 
통렬하게 회화화되고 풍자되고 있다. 또 겨울의 개골산에서는 세상 만물이 자연으로부터 
나서 세상을 풍미하다 다시 자연의 품안으로 귀의하는 생명의 이치가 절제된 움직임으로 

고즈넉하게 그려진다. 여기서 보듯 이 작품에선 황진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행적을 통하여 

그녀를 신비화하거나 신화화하는 대신에, 시대적 풍경과 아울러 인간의 근원적 본성에 

대한 탐색을 시도한다. 황진이의 삶의 궤적에서 드러나는 자연적 본성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태도와 자유분방함은 그녀를 한낱 욕망의 화신으로 치부하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당시의 봉건사회뿐 아니라 오늘의 시민자본주의 사회에도 여전히 

만연해 있는 가식과 인습적 허울에 대한 역설적 공격에 다름 아니다. 
서사적이고 극중 현실로부터 거리를 갖게 하는 코러스는 옛 시절과 현재를 수시로 
연결하면서 황진이가 구현한 개별적 삶의 자세로부터 인생의 교훈을 도출하며 관객에게 
현자의 예지를 표현한다. 코러스의 기능은 더 나아가 시조창(노래)과 춤을 통해 작품에 
서정성과 음악성을 부여하며, 이것은 작품에 회화성을 더해준 의상과 더불어 이 공연의 
미적, 예술적 가치를 높여준다. 배우들의 연기도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묘사하는데 있어 
지나친 과장이나 모자람 없이 사색을 위한 여운을 남기며 전체적인 앙상블을 일구어낸다. 

여기에 문학적 은유가 담긴 유려한 시적 대사와 또 촌철살인의 명 시구(詩句)들이 

들어있는 대본(김학선, 이응률 공동작)도 이 작품의 예술성을 고양시키는 데 힘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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