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의경 '북벌'

clint 2026. 6. 22. 06:47

 

 

삼전도의 굴욕 이후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간 봉림대군은 고국으로 돌아와 
형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조선 17대 효종이다.
왕위에 오른 뒤 강력한 군사력을 양성하고 송시열을 중용하여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를 물리치고 북벌계획을 추진하는데... 청나라의 조공이며 계속된 가뭄으로 
니라의 경제 상황은 어렵기에 군비 충당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효종은 북벌계획을 강행하여 조총, 대포개량 등 무기를 만들고 군사력을 키운다. 
군대를 시찰하며 "너희들을 고생시키는 나의 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우리 백성이 떳떳이 
사는 길이 오직 오랑캐를 치는 일. 가슴에 깊이 칼자국처럼 박힌 삼전도의 치욕.
너희들도 잘 알렸다." 라고 독려한다.

 

 


계속 흉년이 들자 조정에서도 군비 감축을 논의하며 상소하는 등 왕의 명령에도 대립
하게 되고 왕도 말 타다가 낙상하여 병상에 누워있었다. 주변정세의 악화로 고심하던 차,
청의 요청으로 나선정벌에 나선 조선 지원군이 승리했다는 낭보가 온다.
그리고 효종은 다시금 북벌 단행을 결심한다. 송시열도 북벌은 침략도 복수도 아닌 
우리의 자강책(自强策)이라며 효종의 북벌을 지원한다.
왕에 오른지 10년, 이해에도 가뭄이 시작된다. 왕은 몸이 불편하나 기우제를 올린다.
너무나 간절한 기원에 하늘은 비를 내린다. 그러나 왕은 제단에서 쓰러진다.
북벌의 의지를 굳게 하여 10년 간 노력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39세에 타계한다.
 온나라의 절망과 슬픔은 컸다. 그러나 왕은 외친다.
"그렇다, 북벌은 이제 시작하는 거다. 과인은 죽지 않았다."



연극 <북벌>은 극작가 김의경이 집필하고, 국립극단이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작으로 초연한 대표적인 창작 역사극이다.
이 작품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 정벌(북벌)을 추진했던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원대한 포부와 좌절을 중심으로, 당시 왕실과 조정 대신들 간의 갈등을 그렸다.
국립극단의 대표적인 흥행작이자 작가의 또 다른 역사 대작인 <남한산성>의 연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북벌>은 나쁘게 말하면 통속 사극이고, 좋게 말하면 대중 사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속적인 성격은 서막에서 공주를 오랑캐 땅으로 보내는 이별 장면과 만주 심양 땅에 볼모로 잡혀 있는 조선 사람들의 인신매매 시장 장면 같은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 뒤에 전 역사가 도무지 감동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작가는 왕가의 의지와 민중생활의 단면을 교류시키려는 의도를 엿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극 속에서 충분히 용해되지 못한 까닭에 효종으로 상징된 왕권의 일방적인 강행만이 눈에 띄었다. 다시 말하면 효종의 북벌의지와 상층의 집념을 민중 속에 보편화시키기 위해 설정한 상복이라는 소년의 삽화는 너무 인위적인 구성이라는 느낌을 주었고, 거기에다 그의 어미를 자살하게 하는 장면 따위는 억지로 다듬어진 작가의 작위성 때문에 비극적인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희극적인 느낌을 주었다. 상복이 어미가 심양 땅에서 청나라 사람의 씨를 배게 되고 그 때문에 심양까지 찾아온 남편이 죽게 되자 그 한 때문에 청나라 사람의 씨를 ‘조선화’시켜서 어영군에 들어가게 한 다음에 죽은 애비를 위해 복수할 것을 당부하여 목을 매는 사건은 그것 자체가 한 편의 극이 됨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북벌>의 이념에 끼워 넣음으로써 통속극의 한 요소로 타락시켜 버렸다. 이 연극에는 한국 연극계의 기라성 같은 연기자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했지만, 효종을 맡은 장민호의 집념만이 두드러졌을 뿐이고, 다른 등장 인물들은 전혀 개성이 없었다. 알맞은 배역을 얻지 못한 연기자들은 제격을 갖추지 못해서 개성이 죽어 모두 꼭두각시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 무작정 이름난 배우 총동원한다고 해서 좋을 것이 전혀 없음이 이 연극을 통해서 증명이 되었다. 많은 등장 인물들의 처리 장면, 특히 효종의 군중 시찰에 동원된 병사들의 질서 없는 군영 장면에서 우리는 수효를 가지고 관중을 압도하려는 연출의 속임수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왜 많은 배우들이 무대를 메워도 여전히 무대공간이 비는 듯한 아쉬움이 남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제 아무리 많은 배우를 등장시켜도 결국 드라마 자체가 밀도 있지 않으면 무대에는 찬바람이 불게 마련이다. 반대로 극 자체, 곡 작품이나 연기력이나 또는 연출력에 따라 한 사람이나 두 사람만으로도 무대가 가득 차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사극에서는 연기자들이 중후한 역할과 고전적인 의상에 짓눌려 자기의 개성을 연극에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그저 자주 들락거리며 무대를 분주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사극의 경우에는 특히 ‘사람’이 두드러지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북벌은 효종대왕의 개인 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국가의 이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민중과의 대화는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김의경의<북벌>은 이 점에서 너무 생경했고, 이진순의 연출도 너무 차원이 낮았다. 무대설비의 국제 수준을 시험하는 향연에 쏟아 부은 막대한 경비에 견주어 이 공연에서 얻어진 것이 너무 적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민속연희를 외형적으로 도입하는 외에 내면적 관점, 즉 주제에서 민족의 투쟁사를 형상하고 있는 점이다.  

 

 

 

김의경의 '북벌'은, 당시 외침에 의한 민족수난과 그 수난의 질곡으로부터 분연히 일어나 항거하는 민족의 저항정신을 부각시킨 연극에 있어서의 민족주의 정착에 큰몫을 담당하였다. 북벌론(北伐論)은 소중화사상 에 입각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청나라의 오랑캐에게 당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등의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명을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가치관을 가졌던 서인계 붕당은 후금 과의 실리외교를 추진하던 광해군을 패륜 정책으로 규정하고 인목대비 폐모 사건과 함께 광해군을 축출하는 중요 명분으로 이용하였다. 이 주장의 발단은 삼학사에 있으며, 뒤에 효종의 북벌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주로 노론에서 주창하였다. 그 뒤에도 1674년 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일어나 청나라 내, 내부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여 숙종 초에도 윤휴 허적 (許積)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어 북벌을 담당할 기구로서 도체찰사부를 설치한 뒤 산성을 축조하고 무과 합격자를 늘리고 전차(戰車)를 제조하는 등 병력과 군비를 증가시켰다.(→ 삼번의 난 ) 그러나 청이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1680년 남인 이 실각함에 따라 사실상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청을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집권 노론층은 북벌을 이념화해 정권유지와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삼았다. 지나치게 명분론에 치우진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이념은 조선을 고립시켜 청나라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였고, 근대화로 치닫는 세계사의 흐름에서 조선을 완전히 이탈하게 만들었다.

 

 

 

 

작가 김의경의 사극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병자호란을 다룬 <남한산성><북벌>이고, 

두 번째는 일제침략기의 항쟁을 다룬 <함성> <어머니>이며, 세 번째는 관동 대지진을

다룬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이다.

<남한산성>의 최명길, <함성>의 최익현, <대한국인 안중근>, 국난의 시기에 민족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처신하였고 어떻게 올바른 길을 걸어갔는지를 희곡화함으로써, 

우리 나라 역사극의 한 줄기를 이뤘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하여 시대와 예술과의 관계, 

예술과 인간과의 관계를 질문하고 있으며, 다양한 다큐멘터리적인 기법과

객관적인 묘사로 인공적으로 채색되지 않은 이중섭의 투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 김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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