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데이비드 해어 '에이미'

clint 2026. 6. 24. 14:42

 

 

에스메의 외동딸 에이미가 남자친구 도미닉과 함께 찾아온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에이미와 이야기를 하던 에스메는 에이미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에이미가 비밀로 해달라 요청했지만 신문에 동정란을 기고하면서 근근히 먹고 사는 
도미닉의 여러 태도들이 못마땅해 결국 도미닉에게 에이미의 임신 사실을 알린다.
6년 후, 아이를 낳고 도미닉과의 결혼생활을 이어가지만 에스메는 연극은 무시하고 
미디어만 믿는 도미닉이 여전히 못마땅하다. 도미닉 역시 자신과 자신의 일을 무시하고 
낡은 방식만을 고집하는 에스메가 편할 리 없다.
미묘한 갈등은 수면위로 올라와 직접적인 다툼으로 이어진다.
8년 뒤, TV드라마 등에 출연하면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던 에스메는 프랭크가 권유로 
로이드회사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금액의 빚을 지고 이 일로 에이미와 다투고 만다. 
현실적인 에이미는 매사에 즉흥적, 일방적인 에스메의 태도에 분개하고 싸우고 나간다.
2년후 웨스트엔드의 아주 작은 극장에서 공연하는 에스메를 도미닉이 찾아오게 되는데...

 

 

 

 

이 작품의 기본 구조는 가족이며, 갈등을 극명하게 증폭시키는 인물은 장모와 사위다. 

장모 에스메는 연극배우. 그녀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등을 돌려버린다.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들이 점점 짓밟히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위 도미닉은 다르다. 

그에게 연극은 죽은 것이다. “옛날엔 흥미진진했지만 가버렸다고 굳게 믿는다. 

그는 장모에게 이제 연극은 그저 자위행위라며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강변한다. 

두 사람은 첫 대면에서부터 서로의 이질성을 직감한다. 그 예민한 대립각은 79년부터 

95년까지, 그러니까 16년 동안이나 해소되지 않고 이어진다. 장모와 사위로 대표되는

·구세대의 갈등은 이 연극의 가장 굵은 기둥이다.

해어의 독설은 3막에서 두드러진다. 점점 늙어가는 에스메는 로이드 증권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알거지가 된다. 남은 것은 날마다 날아오는 빚 독촉장뿐이다. 

에이미는 여전히 세상물정 모르는 엄마에게 그 인간들은 매너 있는 척하지만 속은

사기꾼, 깡패랑 다를 게 없다며 격분해 외친다. 결코 엄마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가득찬 에이미는 3막에서 불안하고 과격한 모습을 보인다. 

그 불안한 광기 속에는 엄마가 반대했던 결혼, 하지만 결국 이혼에 이르고 만 자신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리고 머잖아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전조(前兆)가 묻어난다.

마지막 4막에서 에스메와 도미닉은 재회한다. 사위는 이제 성공한 영화감독이다. 

늙은 장모는 웨스트엔드의 허름한 소극장에서 연극을 준비 중이다. 그들의 재회는 

16년 전의 첫 만남처럼 여전히 팽팽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결국 화해에 이르는

장모와 사위. 그것은 자칫 극 전체를 지탱해온 긴장감이 일시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결말이었지만, 그 마지막 장면을 연극의 클라이막스로 기억하게 만든다.

 

 

 

극은 연극과 영화 외에도 신구의 갈등, 이상과 현실, 진짜와 가짜가 충돌한다. 에스메는 도미닉이 속한 미디어의 세계가 가짜라고 부정하지만 그녀 또한 진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연극만이 진짜이고,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에스메는 오히려 진짜의 문제, 즉 현실의 문제에는 서툴다.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던 프랭크가 투자에 실패하여 전 재산을 잃고, 앞으로 평생 갚아야 하는 빚을 떠안게 되지만, 이 일을 해결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배우로서 무대 위의 인생은 컨트롤할 수 있어도 정작 자신의 진짜 인생은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 그토록 경멸하던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가 되지만, 에스메는 여전히 텔레비전 드라마를 무시하고, 진짜가 아니라 흉내 내기에 급급한 텔레비전 배우들의 태도를 비난할 뿐이다. 진짜를 추구하지만 정작 진짜 삶을 살지 못했던 에스메는 에이미의 죽음을 겪으면서 진정한 배우가 된다. 자식을 잃고 자신을 찾은 에스메는 에이미가 얘기한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배우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대립해오던 도미닉과도 화해를 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연극은 낡은 것이라 부정했던 도미닉도 에스메의 연기를 보면서 연극을, 서로를 인정하게 된다. 극단으로 대립하는 두 사람이 에이미로 인해 화해의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긍정과 부정으로 놓을 수 없는, 각자 삶에 충실했고 각자 자신의 가치와 원칙에 충실했던 두 사람의 화해를 통해 연극과 영화의 화합 가능성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 에이미의 시선이 놓인다.

 

 

 

<에이미>는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가 줄 수 없는 연극의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극은 무대의 변화조차도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사건 전개는 에스메의 집 거실에서 이루어진다. 마지막 장에서 극장의 분장실로 배경이 이동할 뿐 단조롭고 한정된 공간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관객이 배우와 배우와의 호흡에 집중하게 한다. 소극장이다 보니 배우의 호흡과 눈빛까지도 가깝게 느낄 수 있고, 관객들의 시선을 몰입으로 연결시키며 기대를 충족시키는 배우들의 연기는 연극이 줄 수 있는 매력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시각적 장치를 단순화하였기 때문에 더욱 배우와 배우들 사이의 갈등에 몰입하게 하는, 연극이라는 장르가 가진 아날로그적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에스메 역의 윤소정이 보여준 연기는 인상적이었는데, 잘 나가는 여배우일 때의 그녀는 아름다운 붉은 드레스를 입고, 런던에서 택시를 타고 교외의 집으로 돌아올 정도로 여유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전 재산을 날리고 그토록 경멸하던 텔레비전 드라마에 엑스트라로 출연해 근근이 살아가게 되자, 촌스러운 주황색 의상을 입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다른 여배우에 대한 불평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머리카락은 갈수록 하얗게 셌으며, 허리도 구부정해졌다. 실제로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사치스러웠던 시절에서부터 전 재산을 날리고도 현실감각 없이 수동적이기만 했던 모습에서, 딸을 잃고 내면의 성장을 거듭한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극 속에서 16년이 흐르는 동안 외모에서부터 목소리, 행동까지 늙어갔다. 그리고 그러한 에스메의 내면의 변화는 관객들의 감정선을 자극하며 설득한다. 이는 볼거리로 채운 화려한 무대,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여 떠들썩하게 웃고 떠드는 무대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배우와 호흡하며 배우의 내면에 관객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연극이라는 것이 가진 본래의 매력을 충분히 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연극이라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엄마 에스메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대변하는 도미닉, 그리고 과거로 상징되는 에스메가 아니라 미디어로 상징되는 도미닉이라는 미래를 선택하지만 그 둘의 화해를 바라는 에이미의 시선, 연극 <에이미>는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가깝게 호흡하며 소통할 수 있는 연극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미디어에 점차 밀려나고 있지만 사람 냄새나는, 사람과 가깝게 호흡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연극의 매력을 잘 보여준, 그래서 미디어 시대에도 연극이 존재할 가치가 있음을 배우들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데 연극 <에이미>의 의미가 있다.

 

데이비드 헤어(David 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