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1989년 에이즈를 앓다가 마흔 둘의 나이로 요절한 프랑스 작가. 그는 이십대에 러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미국 등을 여행하며 노동자 계급의 출구 없는 삶, 거래를 위한 언어 교환 말고는 더 이상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 상황을 목도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이란 영역 싸움을 하는 동물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계급을 구성하는 원리다.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은 백인 자본이 소유한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폐쇄 직전의 공사장에서 벌어지는 이주 노동자인 백인과 정주민인 흑인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흑인의 영역을 침범한 백인들은 확보한 식민지를 고수하기 위해 늘 날이 서 있다. 곧 일터를 잃게 될 백인 칼은 사막의 재칼처럼 으르렁거리고, 소장 오른은 때늦은 혼인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제 영역을 표시하고 떠나고자 한다. 삶에 지친 독일계 프랑스 이민 노동자 레온은 늙은 숫사자의 영역에 의탁하려고 기어든 암사자처럼 절박하다. 여기에 초식 동물 누우 같은 흑인 알부리가 백인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죽은 제 동족의 시체를 거두기 위해 그는 그림자처럼 그들 주변을 서성댄다. 마치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들을 찍은 자연 다큐에 가까운 풍경이다. 이를 콜테스는 카메라를 대신해, 치밀한 언어로 따라간다.

20세기가 남긴 제국주의의 잔해와 식민지의 삶의 그늘을 콜테스의 연극은 그리고 있지만, 외려 신자유주의 하에 노동 시장의 세계적인 이동 속에서 더 이상 자기 영역을 고수할 수 없게 내몰린 오늘날 인간 상황을 예언하고 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속한 세상의 정주민으로 살 수 없는 우리들….
부르주아 계급은 도덕적 황폐함에 매몰되어 삶의 지향을 잃고 있고, 노동자 계급은 빠져 나올 수 없는 노동의 피로 속에서 고향을 잃어 가고 있는 중이다. 콜테스의 전언이다.

세네갈에서 나이지리아에 이르는 서아프리카, 외국 회사의 공공 공사장
모든 사건은 황혼부터 날이 밝기 전까지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다.
어느 날 공사장에 신비스런 흑인 사나이 알부리가 나타난다.
알부리는 어린 흑인 노동자의 시체를 찾으러 공사장에 온 것이다.
그러나 공사장의 소장인 오른은 시체를 찾고자 하는 알부리의 요구를 못들은 체 하며,
물질적인 보상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려한다.
그러나 알부리가 시체를 찾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사실보다는 시체에 대한 제의적인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알부리는 계속 시체의 반환을 요구하지만, 소장 오른과 젊은 기술자 칼은 시체의 행방에 대해서 함구하려 한다.
그러나 칼의 충격적인 고백을 통해 알부리가 찾고자 하는 시체의 행방이 서서히 밝혀지려 하는데...
이런 와중 알부리는 파리에서 온 오른의 젊은 아내 레온은 만나게 된다.
레온은 남자들만 존재하는 이곳에 등장한 젊은 여자란 사실만으로도 사건의 중심에 있는 여자이다.
레온은 알부리를 본 순간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예감을 느끼게 되는데...

아프리카라는 낮선 공간에서 펼쳐지는 한명의 흑인과 세명의 백인 이야기는 농밀하면서도 동시헤 서늘한 건조함을 느끼게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이 삶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향해 달려가고자 하지만,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인생들이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흑인 노동자의 시체를 찾기 위해 공사장에 찾아온 신비스런 흑인 알부리.
보잘 것 없는 인생이지만 산전수전 다 껶으며 공사장의 소장이 되어, 인생 황혼기에 젊은 프랑스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한 오른. 그리고 오른과 함께 공사장에서 일하는, 알콜 중독자이자 아프리카의 삶을 증오하는 남자 칼.
이들의 네명의 관계를 서로를 향한 본능과 욕망으로 엮기게 된다. 시체반환을 요구하는 알부리에게 레온과 오른은 알 수 없는 신비감을 느끼고, 특히나 레온은 알부리와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칼은 신비스런 알부리의 존재가 맘에 들지 않고, 알부리가 찾으려 하는 시체는 이미 칼에 의해 훼손 된 상태이다. 오른은 아프리카를 떠나고 싶어하지만 떠나지 못하고, 프랑스여인인 레온은 누구보다 아프리카를 느끼면 그곳에 남아있고 싶어하지만 아프리카를 떠난다. 알부리를 죽이려 하던 칼은 오히려 자신이 죽고 말며, 시체를 찾으러 온 알부리는 대신 칼의 시체를 목격하게 된다. 이처럼 각자의 인물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도 획득하지 못한 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한번의 본인의 욕망이 성공한적이 없기에 아프리카라는 낮선 공간을 증오하고 동시에 사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환경을 그 누구보다 자신을 고독하게 만들며, 알 수 없는 불안의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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