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희곡의 정경은 D H. 로렌스가 작고한 프랑스, 리비에라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적이다. 런던에서 로렌스의 미술전람회가 개회됐던 것은 그가 죽기 조금 전이다. 이 미술 전람회는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기법은 소박하지만 제재가 노골적으로 육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경찰에 의해 압수됐고, 당국의 명령으로 금지되지 않았더라면 소각 됐을 거다. 그 당시 로렌스의 성욕에 관한 위대한 연구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과거의 그의 많은 작품도 검열관의 발표 금지처분을 받고 있었다.
로렌스는 근원적인 생명의 충동으로서 성(性)의 신비와 힘을 느꼈으며, 위선의 창고 속에 이성의 주제를 감금시키고 싶어 했던 사람들을 평생 적으로 여겼다. 그의 수많은 작품은 혼돈되어, 여성의 남성에게의 의존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망념에 왜곡되어 있지만 그의 작품의 태반이 창조의 어두운 심층을 파헤친 현대의 최대 기념비이다. -- 테네시 윌리엄스, 뉴올리언스에서

현대연극사에 있어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아더 밀러와 '유리동물원'을 쓴 테네시 윌리엄스는 여러 면에서 대조가 되는 극작가이다.
아더 밀러가 남성적이고 산문적인 극작가라면 테네시 윌리엄스는 여성적이고 시적인 극작가이다. 밀러와 윌리엄스 이 두 극작가는 모두 사실주의를 작품의 바탕으로 삼고 있지만 그 지향하는 바는 엄밀히 말해서 많이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밀러가 그의 사선을 사회에 투영시킨데 반해서 윌리엄스는 인간내부에다 포커스를 맞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것은 밀러가 그의 작품 '다리에서의 조망'의 서문으로 쓴 '사회극에 관해서' 란 에세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진정한 극작가는 사회극을 써야 한다는 작가적 태도와 입장을 밝힘으로써 그의 작품을 꿰뚫고 있는 커다란 물줄기는 사회악의 고발임을 명백히 했다. 반면에 윌리엄스는 작가가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국 전체의 강박관념보다는 자기 자신의 강박관념을 추구했다. 즉 상황 속에 놓인 인간보다는 내면의 극, 영혼의 극을 쓰려 부심했다는 이야기다.
1914년 미시시피의 콜럼부스에서 출생한 윌리엄스는 처녀희곡 '天使들의 싸움(1940)' 이후 미국 연극사의 새 장을 열게 한 '유리動物園'(1940)을 발표하여 그의 명성을 떨쳤고, 그로 인해 작가적 지위는 확고하게 굳어졌다. 이어서 윌리엄스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47) '여름과 연기'(1948) '장미문신'(1948)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1955) '지옥의 올페' (1956) '지난여름 갑자기'(I958) '이구아나의 밤' (1961) '고해'(1972) 등 격조 높은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래서 윌리엄스는 그의 뛰어난 문학적 업적에 대한 상을 많이 받았다. 록펠러 재단 장학금을 비롯하여 국립예술원 상, 뉴욕 연극비평가협회 상, 그리고 영예로운 퓰리처 賞은 두 번이나 받았던 것이다.
윌리엄스의 극작품이 절찬을 받게 된 원인은 그의 작품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누구나 쉽사리 알게 된다. 그는 두 가지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연극 속에서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는 재능이고, 또 하나는 대중적인 평범한 언어로 극화하는 재능이다.
에스터 M. 잭슨의 말을 빌리면 "劇作家로서 테네시 윌리엄스가 갖고 있는 중요한 자산은 인물, 상황, 대화의 형식, 그리고 박진감 있는 극적 장면을 만들어 내는 재능이다." 라고 했는데, 그 의견은 윌리엄스의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불꽃 속에서 외치는 불사조' 는 윌리엄스가 그의 청춘시대 우상이었던 D. H. 로렌스를 주인공으로 한 단막극이다.

로렌스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근원으로부터 충혈하고 있다. 대지와 星辰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엄청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딱한 사랑의 꽃이여, 우리는 너를 생명의 나뭇가지로부터 잘라내어 문명이라는 탁상의 꽃병 속에서 언제까지나 피어 나가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라고.
여기서 로렌스는 인간성을 박탈한 기계화된 문명을 결코 혐오하거나 저주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단순히 자연에의 회귀를 절규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현대인들이 문명을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아가는데 급급한 나머지 사랑을 상실한데 대해 개탄하고 있을 뿐이다. 정신의 황폐에 대하여 진정한 에로스를 다시 찾아내자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성의 부활은 그저 말초적인 이성의 감각에만 의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바탕으로 한 性이야말로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며 창조적이며 활동과 美의 원천으로 보았다. 윌리엄스의 눈을 통해서 묘사된 로렌스 像은 이 희곡의 서문에서 볼 수 있다.
윌리엄스는 '불꽃 속에서 외치는 不死鳥' 에서 때 묻고 질식할 것 같은 現代社會 文明 속에서 억압되고 고갈된 인간의 생명을 다시 찾고 인간 실존을 해방시키는 원동력을 '진정한 性'의 부활에 두고 있다. - 말하자면 『에로스』야 말로 생명력의 회복, 그리고 원시감정의 복귀를 위한 깃발이라고 호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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