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브래드포드 '홀리스 제이, 어디로 가고 있죠?'

clint 2015. 11. 12. 21:23

 

 

 

 

단막 희극으로 분류해야 할까?... 연애 성장통에 관련된 연극으로 봐야 할 듯.
신정옥의 현대영미희곡에 실려 국내 소개된 작품으로 예전에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대학 신입생 남녀가 나오는데 문제는 남자인 홀리스에 있다. 소심하고 사색적인 그는 같은 과의 엘리를
말은 못했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고 어느날 학교 뒷동산에서 만나자고 했다. 홀리스는 자기 생각이 많은데
만사를 내면의 또다른 자신과의 대화로 생각하고 전략을 짜고 실행에 옯기는 남이 보면 좀 엉뚱한 청년이다.
그런 그가 엘리를 만나기로 했으니 그는 긴장과 초조, 그리고 어떻게 대처하고 진도를 나가야 할지 무수하게
독백을 하며 마음을 달랜다. 잠시후 엘리가 오자 그는 어색해지고 할말을 제대로 못한다. 내심으로는
멋진 멘트를 날리며 엘리를 품안에 안고 있을 텐데... 그는 엘리에게 논문을 좀 읽어봐 달라고 하고
그냥 범생 같은 대화만 할 뿐이다. 결국 엘리가 그에게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고 마지못해 스텝을 배우는데
그만 그의 '남성'이 잔뜩 서서 그만 그걸 죽이느라고 한 5분에 걸친 헛소리를 한다. (엘리의 눈엔 그가 갚은 사색에
잠긴 것으로 보일 듯) 그후 그는 정상으로 돌아와서 그녀에게 다시 데이트 신청을 한다.
홀리스의 독백은 이중 목소리로 표현되는데 재미있는 젊은이의 노골적인 성의식이 잠재되어 있다고 본다.
작품의 중간에 엘리는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많이 하냐"고 그러자 홀리스는 내가 어디로 가고있는지 생각한다고 히자

엘리는 "홀리스 제이, 어디로 가고 있죠?" 라고 묻는다. 이 작품의 제목이다. 그러나 그는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에... 그리고 극의 마지막에 그는 그런 생각하는걸 포기하기로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지극히 친숙하게 된 희곡 《뱀》의 장 클로드 반 이텔리가 그러했고, 작품 《오며 가며》의 미건 테리가 그러했듯이 벤자민 브래드포드 역시 오프오프브로드웨이에서 데뷔하여 상당히 평가를 얻고 있는 신예 극작가이다. 1925년 루이지애나 주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한 그는 주립대학교의 의과대학을 졸업한 내과 의사이자 극작가이기도 하다. 오프오프브로드웨이 극작가들이 주로 감각적인 차원에서 주제를 다루고 있듯이 브래드포드 역시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는 현대연극의 전위적 주류 속에 있는 극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우선 우리가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표상은 성의 문제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성의 문제야말로 이 극작가의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동기이며, 그 관능세계가 또한 연극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설득력 있게 제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성의 주체가 현대연극의 진지하고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부인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브래드포드는 섹스의 문제를 현대의 기계적 상황에 직면한 오늘을 사는 인간에게 현실감을 동반하고 육박해 오고 있는 점을 그는 시대의 아픔과 결부해서 극명한 묘사를 통해 형상화 하고 있는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기계문명, 산업사회가 물질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켜 버리고 난 다음의 인간은 모름지기 다분히 성애 적이며 폭력적인 경향에로 치닫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목도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놓쳐버릴 수 없는 것은 그가 문제적 과제로 잡고 있는 성의 문제가, 관능의 세계가, 그의 작품세계의 원핵(原核)을 이루고는 있지만, 그의 작품을 주위 깊게 살펴보면 결코 외설적인 극작가는 아니다. 도착된 성의 세계를 묘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섹스를 찬양하는데 그치고 있지도 않다. 성의 문제를 즐거이 다루고 있으면서도 다른 극작가들과 다른 점은 성의식의 중후 성을 심리의 복잡한 음영을 우리 앞에 선명하게 그려내어 준다. 다시 말해서 의사적인 안목에서 성 의식의 보다 더 구석진, 그러니 여러모로 깊이를 가진 근원을 우리 앞에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가적 태도가 그의 작품에 투영되어 우리로 하여금 감동의 진폭을 넓혀주는 까닭도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또한 우리가 크게 잘못을 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이 관능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법적 관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관능 그 자체에 작가는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다만 그것을 통해 논리적 관급으로 억제당한 싱싱한 원시감정, 그리고 상실된 생명력과 본연의 인간성으로 복귀하려는 수단이며 뜨거운 몸짓인 것이다.
오프오프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된 그의 희곡 《지리적인 발전》 이라든가 《인류학자》 또는 《집중적인 서클》과 《이상 국》에서도 그가 끈질긴 모색적 노력을 기울인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성 모럴이다. 오늘날 인간이 부딪힌 현실의 상황이 숨 막히는 기계화, 자동화한 산업주의, 사회기구 속에서 소외와 성 문제를 통해서 그것을 끈질기게 탐구하는 극작가가 바로 브래드포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