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김정옥 재구성 '그 여자 억척어멈'

clint 2025. 5. 1. 05:48

 

 

막이 오르면 북(北)에서 1.4후퇴 때 내려온 여배우 박정자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을 연습하고 있다. 북에서 전쟁을 피해 
부산에 온 여배우 박정자는 역시 부산에 피난해 온 연출가 김석두를 만나 

브레히트의 '억척어멈'에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박정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 
그리고 남쪽으로 피난 오는 도중 인민군의 의용군으로 끌려간 
아들을 잃고 오직 연극 연습에 몰두한다. 그 사이 아들이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면회를 갔으나 
아직은 만날 수 없다고 거절당하고 1.4후퇴 때 만난 남자와의 
굴절된 애정행각 등이 펼쳐지는데 또 하나의 충격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 검열에 걸렸다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동구권의 작가이므로 대한민국에서는 브레히트의 
작품은 상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출자와 박정자는 
굴하지 않고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새로운 작품을 발상, 
동학란이 배경인 <억척어멈>을 다시 연습하고 막을 올린다.

17세기의 종교전쟁, 19세기의 동학,  20세기의 한국전쟁은 
21세기에 넘어 와서도 아직도 끝나지 않고 핵폭탄이니 로켓포 등

검은 유령이 한반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래서 <억척어멈>의 저항의 외침과 평화를 희구하는 노래는 이어져간다.

 

 

 

 

199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연극 페스티벌 '가족'이란 주제로 한.중.일.미 4개국에서 각 한편씩의 1인극으로 '경연'을 펼쳤는데, 박정자씨의 1인극 '그 여자, 억척어멈'이 참가하여 초연 공연한 작품으로 호평을 받아 국내에 돌아와 공연하였다. 국내공연에 앞서 이곳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한국판 브레히트의 '억척어멈(Mother Courage)을 무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부산.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동안 남편과 자식을 잃은 한 여배우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을 공연하려다 브레히트가 공산주의자란 이유로 공연금지를 당하자, 그 검열을 피해 동학혁명의 농민이야기로 바꿔 무대에 올린다는 내용이다. 김정옥씨는 브레히트의 연극미학을 수용해 형식적인 완결성을 높이는 한편 박정자씨의 연기를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하게 함으로써 정체성과 세계적인 보편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는 모노드라마의 단조로움을 넘어서려는 이병복씨의 다양한 무대 표현(인형극. 전쟁기록 사진 활용)도 큰몫을 하고 있다. 일본 공연 시 “브레히트의 연극을 한국적 토양과 잘 접목시킨 작품이다.” 특히 그는 박정자씨를 가리켜 “서랍(무궁무진하게 재능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뜻에서)이 많은 배우”라며 “남녀간의 사랑과 부자관계, 역사문제 등 각기 분절된 이야기를 조화롭게 '인간문제'로 환원시키는 과정이 놀랍다”고 극찬했다. 이 작품은 2016년 원로연극제에서 재공연되었다. 

 



연극평- 김윤철
김정옥, 이병복, 박정자. 이들은 극단 자유극장에서 30여 년을 함께 작업해 오면서 자유극장 특유의 개방성과 각자의 개성 사이의 균형을 견지해온 연극예술가들이다. 한국의 무속과 전통연희에 집요하게 관심을 보이면서 우리의 연극 관습과 서양의 연극유산을 폭넓게 화합해 온 연출가 김정옥. 곧잘 삼베를 시원스럽게 휘늘어뜨리며 민중의 한과 강인한 생명력, 초월적 죽음 등으로 요약되는 한국적 정서를 인상적으로 표현해온 무대미술가 이병복, 가장 한국적인 등장인물과 가장 이국적인 등장인물, 가장 고전적인 성격과 가장 현대적인 성격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가장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여배우 박정자. 그래서 국제적인 연극감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브레히트의「억척어멈」에 한국적 상황을 대입하여「그 여자, 억척어멈」을 만든다고 했을 때 나는 3인 공통의 개방성과 3인 각자의 개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가 제일 궁금했다.
「그 여자, 억척어멈」은 원작의 서사극적 형식을 차용하고 있기는 하되, 연극의 목적은 다분히 서정적이다. 만든 이들이 전쟁의 와중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고도 태연하게 살아남는 억척어멈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의 인간 황폐화를 부각시킨 원작의 정치적 초점으로부터 이탈하여 동학란과 6·25의 불행한 역사를 거치며 남편과 자식을 잃은 한과 슬픔을 절규하고 인내하는 한국 여인의 질기고 끈적한 모정을 형상화하는 것에 치중한 것이다. 그러나 극의 구성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1997년 50대 중반에 접어든 배우 박정자가 1951년 피난시절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50대의 여배우로 분하여 브레히트의 「억척어멈」을 연습하는 과정을 외적인 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여자, 억척어멈」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의 국제적 간텍스트성 말고도 동학과 6·25, 그리고 1997년 오늘의 시점 등이 얽힌 3중의 국내적 간텍스트성과 복합시제를 갖는다. 뿐인가, 극의 구조도 3중의 메타 연극적 복합구조다. 즉, 연극을 연습하는 과정을 연극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메타구조는 사실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자주 동원되는 구조이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정옥은 박정자의 담론을 통해 연극이 현실보다 더 진실할 수 있다는 연극관 내지 세계관을 자주 피력하기도 한다.「그 여자, 억척어멈」은 일단 형식이 모노드라마여서 총체연극을 지향하는 연출가 김정옥의 특성을 살리기에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연극은 대부분 노래와 춤과 드라마가 종합되어 있어 연극 요소면에서도 총체적이고, 치열한 갈등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비극적 내러티브와 갈등해소의 구실이 되고 틀이 되는 굿과 난장의 한국적 희극적 구성이 연극 형식적인 총체성을 이루기 일쑤며, 삶으로서의 연극과 연극으로서의 삶, 죽음을 친구하는 삶과 삶을 동반하는 죽음, 동시대를 겨냥한 사회적 담론과 동시대를 담는 철학적 담론 등이 연극미학과 존재론과 정치학을 묶어서 주체적으로도 총체성을 이루는 것이다. 실제로 「그 여자, 억척어멈」의 탄생 과정을 밝히는 프로그램 노트에서 김정옥은 '1인극의 한계를 넘어서서' '시간과 공간을 몽타주하고 모노드라마이면서 총체연극적인 성격을 살리고' 싶었다고 회술하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 박정자 외에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과 무대감독을 추가했고 이병복의 종이인형들을 등장시켜 인물을 사실상 다인극으로 확대했다. 음악도 생음악 반주는 물론 브레히트적인 소격효과용 노래, 한국의 1950년대와 199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풍경을 담은 대중가요, 한국의 대표적 정서를 담은 전통민요 아리랑 등을 두루 활용하였고 박정자로 하여금 자주 오늘의 대중적인 춤을 추게 하여 시간과 공간을 쉽게 넘나들게 함으로써 뮤지컬의 성격을 강화하기도 했다. 

 

원로연극제 공연. (배해선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