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의경 '남한산성'

clint 2015. 11. 12. 18:52

 

 

 

 

 

국립 극단이 아니면 어느 극단이든 무대에 올리기 어려운 작품이 이작품이다. 1974년 초연때 이진순씨가 연출을 맡았고 김동원씨가 인조, 그리고 장민호씨가 최명길 역을 맡았고 등장인물만도 수십명, 그들의 의상, 분장비만도 어마어마 할듯 하며 중간의 전투 장면까지 집어넣은 대작이라하겠다. 국립극단의 제69회 공연으로 올려진 '남한산성'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군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치욕을 남긴 병자호란을 소재로한 연극으로 작가 김의경이 '무익조' 이후 7년만에 내놓은 야심작이다. 명분에만 사로잡혀 옥쇄를 들먹이는 김상헌 등 주전론자들 가운데 홀로 주화론을 내세워 역적으로가지 몰린 최명길에게 새로운 조명을 비쳐본 작품으로 '죽음이냐 삶이냐', '개인을 위해서냐 모두를 위해서냐' 등 민족보전에 관련된 힘찬 문제들이 담겨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인 김상헌과 주화파인 최명길의 갈등을 부각시켰다.임진왜란을 겪고난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다변외교와 국방관리를 병행했다. 이작품은 패망의 과정아나 결과보다 원인규명에 무게 중심을 둔 작품이다.

 

 

 

 

작가의 말 - 김의경
丙子胡亂을 素材로 하여 戯曲을 써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近18년 전이다. 어느 노점에서 채만갑의 병자록 번역본을 구했는데 이것은 1947年 正품社 發行으로 번역은 윤영이란 이었다."丙子錄"을 읽던 젊은 20代의 가슴이 그토록 답답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丙子 年의 그 안타까운 民族的 悲劇을 캐면 갤수록 나의 피는 뛰고 울분은 더해 가곤 했다. 그리하여 틈틈이 資料를 모으고 이에 관한 책을 읽고 카드를 정리하고 그리고 구상을 거듭하여 붓을 들었다 놓고, 놓고...... 史劇 "南漢山城"은 나에게 너무도 벅찬 욕심이었던 것 같았다. 65년 1월, 그날이 小寒 때이었던가?
......친구 몇몇과 더불어 남한산성 登山을 갔던 적이 있었다. 아침만 해도 날은 맑았었다. 그러나 百濟莊에서 점심을 먹을 무렵 해서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천 억 눈송이가 광활한 하늘에서 폭발하듯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인조가 몽진하실 때 거세인 눈발이 휘몰아쳤다더니, 정녕 그 눈이 나를 향해 포효할 줄이야... 배낭에서 제각기 아이젠을 꺼내 구두에 묶고서도 우리 일행은 미끄러지며 산을 내려왔다. 삼전도까지 왔을 때 우리는 눈앞을 가리지 못할 만큼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한없이 나만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나에게 "南漢山城"에 대한 영감과 特權을 주신 듯한 착각이었을 것이리라.
丙子 年의 南漢山城은 인조에게나 主和論者인 崔鳴古 또는 主戰의 巨頭인 金尙憲 모두에게 있어서 탈출구 없는 限界狀況이다. 그것은 죽음과 삶의 좁은 기로였다. 결코 어느 것도 명예롭지 못했다. 더욱이 그것은 이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뿐만 아닌 民族 전체의 운명을 左右하는 중대사였다. 그들은 하나의 결심을 그것도 통일된 결심을 요구받고 있었으나 원하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원하는 길은커녕 강요받는 굴복이 있을 뿐이었다.
仁祖의 고민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자신의 不應에 대한 한탄과, 하늘의 재앙에 대한 노한이다. 또 하나는 무능한 臣下들에 대한 불신과 노여움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한 아무런 解決策도 없다. 김상헌 등 主戰論者들에게도 마찬가지로 解決策이 없다. 청과 和親한 다해도 청이 和親條件을 지켜 끝내 모욕적인 行爲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和親으로 굴服하고 다시금 和親 後에 조롱을 받는 2중의 치욕을 감수할 수 없다는 것이다. 特히 이들은 明과의 義理를 엄한 덕목으로 믿고 있었다. 어버이 나라인 明의 敵은 朝鮮의 敵이라는 旣存 觀念을 좀처럼 反省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옥쇄함으로써 自身의 몸에 치욕의 衣裳을 걸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 의리에 比해 목숨이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는 선비의 思想은 당연할는지 모르지만 이로써 당하는 백성의 곤욕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忠臣으로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崔鳴告은 가장 냉정한 主和論者이다. 많은 主和論者들이 깊은 理由를 캐낸 후의 主和思想者는 아닌 듯이 보이는 반면 명길은 임금과 백성의 인고를 생각하고 피치 못할 운명의 채찍질까지를 잰 다음 겸손한 마음으로 제단 위에 꿇어앉았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방만이 아니라 그 資任이 내 몸에 너무도 중히 내려져 있다는 자각에서이다. 그는 역적으로서 歷史의 斷罪를 받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라가 이에 이르렀으니 主和, 主戰에 불구하고 그는 죄인이었고 국가적 재난에 대한 無限한 任感과 罪意識을 가지고 이를 超越하고저 했다고 느껴진다. 어떤 이는 나의 이러한 해석이 서구적인 발상법에 근거하고 있다고 꾸짖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속단일 것이다. 결코 명길은 기독교적 原罪思想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하늘이 주는 이 재난의 뜻을 가장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터득하고 또한 실천하려 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鳴吉이라 해서 좋아했거나 한 것은 물론 아니다. 不過 몇 년 후에 그 역시 潘陽에 붙들려가서 친명음모로 심문을 받았으며 이때 김상헌과 비로소 오해를 풀었다 한다. 다만 명길은 와신상담의 機會를 얻기 爲해 온갖 경멸을 한 몸에 받았다. 청軍의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조정 안팎으로 명길의 고기 씹기를 원하는 자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최명길의 염원은 임금을 포함한 만백성의 생명이요, 그 活力 保存에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이 호란이 民族 스스로가 젊어질 멍에이었다. 그는 이것을 하늘이 내리는 채찍질로써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 채찍질을 한껏 가혹하게 맞고자 했다. 우리의 歷史 以來 수없이 반복되어 온 強敵의 침략 속에서 民族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시련을 그토록 받은 이 民族이건만 羞悔를 받지 않기 위한 準備엔 남달리 게으르다.
'南漢山城'의 집필 동기는 여기에 있었다. 왜 우리는 끊임없는 도발을 당하면서도 태연하단 말일까? 그것이 平和를 사랑한다는 증거일까? 되에게 무릎 꿇는 인조개인을 보면 싸다고 할 만큼 밉기만 하다. 그러나 그는 누구인가? 우리들 자신이 아닌가? 仁祖가 三拜九叩頭로 막을 내리기로 했을 때, 나는 붓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를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감아지지 않았다. 한때 가장 不幸했던 이 民族의 代表에게 나는 힘껏 사랑을 쏟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신의 사랑이 아닌 限, 그를 감싸줄 사랑은 없는 듯이 느껴졌다. 나의 사랑이 아무리 커도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기엔 너무도 작았다.
한 歷史란 으례히 영욕으로 점철되는 법이듯이 병자호란의 치욕이 勿論 우리의 全部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民族的 屈辱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敎訓을 남기고 있는가? 나는 敢히, 이 悲劇이 우리 歷史書에 記錄은 되어 있을망정 現代 한국인의 가슴 속에는 살아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붉은 피 수백 섬을 뿌리고 그보다 더 참혹 한 굴욕을 당한 이 백성이 오늘날 여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결코 敎訓的 얘술론 자는 아니다. 나는 내 나라를 더욱 떳떳이 사랑하기 위해서 내 나라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者에 불과하다. 그러한 努力의 일단을 이토록 융숭하게 무대에 올려놓을 수 있었음은 나의 더할 수 없는 행운이다. 8년 만에 내어놓는 이 변변찮은 作品을 爲해서 劇場長 以下 全 스탭, 캐스트 여러분께서 베풀어주신 好意와 협조에 대하이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1막 남한산성의 행궁 안.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몽진한 인조는 적장 마부태를 만나고 돌아온 이조판서 최명길의 보고를 받는다. 마부태가 화친의 조건으로 요구한 왕자와 대신의 볼모 절화를 주장한 신하의 압송 등을 놓고 조정은 의견이 엇갈린다. 명분을 앞세워 화친을 반대하는 신하와 현실적 여건으로 화친하지 않을수 없다는 최명길의 주장이 대립되는 것이다. 척화파 신하들의 우세로 고립된 최명길은 인조와 대하여 다시 화친할 것을 주장한다. 당장의 화를 늦추고, 시간을 벌어 군비를 비축하고 적의 틈을 엿보기 위해서 화친한 것을 재삼 주장하나 인조의 극렬한 노여움을 사 물리침을 당한다.

2막 서성(西城) 일대

죽음과 패전의 실상을 모르는 환상적인 주전론자와 파당적 이익을 위해 맹목적으로 화친을 반대하는 신하들 틈에서 고민하는 최명길. 적의 맹공을 늦추고자 가짜황제와 대신 적진으로 보냈으나 그들은 탄로 되어 모진 곤욕을 당하고 드디어 적병이 싸움을 걸어온다. 인조가 몸소 독전하는 가운데 벌어진 싸움에서 몇 명의 적장을 죽이고 일단 적을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이어서 성루에 적장의 목이 효시되고 승전의 출연이 벌어진다. 흥에 겨운 인조마저 벽사진경의 독무를 추는데 철 아닌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발이 점점 세어지자 인 조는 하늘을 향해 "철 아닌 찬비를 내려 입을 옷도 잘 곳도 없는 내 군사 내 백성 어찌하라 시오." 하며 비통하게 소리친다.

 

 

 

 

 

3막 제1장 묘당(廟堂)의 집무실

전략도 없이 술사의 점괘만 믿고 무모한 싸움을 벌렸던 도체찰사 김유는 참담한 패전을 하고도 책임을 다른 군사에게 돌리기에 급급하다. 설상가상으로 청의 황제 한이 직접 남한산성 공략에 나서니 성의 운명이 더욱 급박하게 되었는데 전수어사 완풍군의 죽음이 알려져 인조를 더욱 비통하게 한다.

2장 행궁전(行宮殿)

정원 초하루 수랏상을 받은 인조는 모든 일이 비감해지기만 한다. 군량은 물론 마소에게 먹일 마량초마저 떨어진 현실. 중신은 아직도 동인 서인의 파당으로 국본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데 적진에 갔던 홍서봉과 김신욱이 한의 서신을 가져온다. 오만한 한의 서신은 인조가 충성하여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 속수무책인 인조는 제발 출성만 하지 않도록 유념하여 답서를 쓰도록 명한다. 최명길은 회한에 몸부림치며 굴욕의 답서를 쓴다.

3장 행궁 뜰악

최명진이 쓴 답서를 인조에게 보이려 할 때 김상헌이 뛰어들어 국서를 가로채 보고 찢는다. 사나이로서 한번 목을 짤려서라도 외롭게 죽을망정 이 굴욕을 당하고 살아남으려 하느냐고 호통을 친다. 죽음을 딛고 명일의 신용을 기약하기 위해 화친을 다시 주장하는 최명진, 인조는 국서를 찢는 신하의 기백이 영혼을 지탱해주고 치욕의 국서는 더러운 육신을 지탱 한다며 다시 국서를 쓰도록 명한다.

 

 

 

4막 행궁전 및 내전.

차마 화친의 압송을 결단하지 못하는 인조, 영상 김유는 무관을 불러 소요를 종용, 인조의 진심을 촉구한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인조는 눈물을 머금고 윤집, 오달제 두 신하를 최명길이 호송케하여 적진으로 보낸다. 사지로 가면서도 의기로운 두 학사, 애통한 마음으로 두 학사를 전송하던 백성들은 최명길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백성들이 어찌 최명길의 깊은

뜻을 알랴.

5막 행궁 뜰악, 내전, 수항단.

척화신을 호송하여 적진에 갔던 최명길이 강화도 함락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다. 묘사주를 모신 최후로 믿었던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들은 인조는 성만은 끝내 버티려던 기력을 잃고 드디어 출성하여 항복할 것을 결심한다. 항복의 격식대로 호복을 입고 출성하려는 인조를 보고 내전의 신하들은 울음을 참지 못한다. 김상헌은 주춧돌에 머리를 부딪치며 차라리 죽음으로 이 지옥을 짓자고 통곡한다. 인조는 오늘의 치욕을 오늘로 끝내기 위하여, 이 치욕을 견딜 것을 당부하며 출성한다. 수항단 높이에 한이 나와서고 인조가 아홉 번 머리를 치고 세번 절하는 인사를 하고 수항단을 향해 걸어갈 때 비장한 합창 "생존인가. 죽음인가" 가 고조되는 때 막이 내린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작가가 최초로 쓴 본격적인 역사극이다. 주화파 최명길과 주전파 3학사 간 대립이 중심 갈등을 이룬다.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왕과 대신들의 무능함과 부패를 대비시켰다. 5막에서는 강화도가 함락된 뒤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 꿇고 항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비극적 클라이맥스를 부각했다.

작가는 이후 그 연작이라 할 만한 「북벌」(1978)에서 삼전도의 치욕을 씻으려는 효종의 북벌 계획과 좌절을 다루기도 했다. 1975년 이진순 연출로 국립극단에서 제작했으며, 초연 당시 백상예술대상 대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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