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후계자 결정과정에서 아들 태종에게 왕위를 빼앗기다시피 하고 물러나야 했다. 1차 왕자의 난을 거쳐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자신의 형을 왕으로 추대하고 태조를 태상왕으로 삼았다. 이때의 태상왕은 창업군주로서의 이성계를 존숭해 부른 칭호였다. 이 작품은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파란만장한 왕, 상왕. 그리고 태상왕시절의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특히 이들 방원과의 왕권다툼에서 본인이 소외됨을 느끼자 모든걸 버리고 전국을 떠돌며 결국 고향인 함흥에 기거하나 방언의 끈질긴 노력으로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서 화해하는 장면까지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공연이 안된 작품이다. 앞서 소개한 북향묘와 같이 읽으면 좀더 이해가 쉬울 듯하다. 1970년대에 이런 대작 겸 역사극을 하기는 국립극단 밖에는 없었기에 공연이 안된 것이 더욱 아쉽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체성의 나라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불과 6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인 왕위에 스스로 오르는 영웅다운 삶을 살아낸 그였지만 말년에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의 권력 다툼 앞에서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비극의 시작은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급진적 신진 사대부의 힘도 컸지만, 안으로는 이성계의 집안에서도 새 나라를 개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의 소생인 다섯째 아들 방원(훗날 태종)과 그의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였다. 개국공신에게 논공행상이 있듯이 집안의 큰 조력자들에게도 논공행상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왕위를 예약하는 세자의 자리였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그 세자 자리가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참모 역할을 했던 정도전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도록 불철주야 내조한 강씨의 생각은 달랐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골수 깊은 신봉자인 정도전에게 너무 강한 성격의 이방원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은 부담이었다. 강씨는 내조의 공을 전실 자식인 이방원이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강씨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이미 첫 부인 한씨가 사망한 뒤라 이성계의 곁에서 이방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방원으로써는 너무나 억울하게 ‘죽 쒀서 개 준 격’으로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자리를 차지하였다. 나라도 무너뜨린 이방원이었다. 눈앞에서 왕위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 지켜볼 인물이 아니었던 이방원은 즉시 정도전과 맞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해 죽이고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모두 살해하였다. 아버지 이성계가 번연히 살아 있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성계는 이 변란에서 두 아들과 사위까지 잃었고 권력 앞에 인면수심으로 행동하는 자식들의 다툼에 인생무상을 느꼈다. 이성계는 마침내 1398년 9월에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었다. 정종의 즉위는 난을 일으킨 후 바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보일까 염려한 이방원이 마련한, 왕으로 가기 전 일종의 유예기간인 셈이었다. 이후 2년 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넷째 형 방간마저 물리치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의 3번째 왕으로 등극하였다.
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목숨을 건 권력 다툼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전국 각지의 산과 사찰을 돌며 그의 과거사를 돌아보며 참회하며 정치를 잊고 마음을 다스리나 태종이 된 아들 방원에 대한 분노는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 후 충신인 이지란과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몹시도 증오하였지만 이미 이방원에게로 기운 대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매번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는 아들이 보낸 차사마저 모조리 죽여서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때 나온 말이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을 때 쓰는 '함흥차사’란 말이다. 이후 이성계는 무학 대사와 이지란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상완인 아들 정종(방과)와 태종(방원)과 재회하고 방원의 참회로 극적인 화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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