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증자 '나의 황홀한 실종기'

clint 2025. 1. 27. 21:48

 

 

주인공(윤금숙)은 80세인 1933년생이므로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나 

덜 개명된 불평등 사회에서 겨우 중등 교육만 받고 정년이 되어 

인텔리 남편을 만나 남매를 키운 전형적인 가정주부이다. 

그런데 그녀의 일생은 동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수난에 찬 우리 현대사가 동시대사람들을 불행하게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녀는 결혼생활 대부분을 인생관과 취향이 다른 

지방대학 교수와 주말부부로 살아야 했고, 장애아까지 혼자서 돌보다가

떠나보내야 했으며 장성한 외동딸마저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핵가족시대에 미처 적응 못한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든 것은

장애아를 끌어안고 고통 받고 있을 때 무관심한 남편은

외도까지 함으로써 사랑이 증오로 바뀐데 따른 것이었다.

 

 

 

 

급격한 노령화시대를 맞이하여 작금의 우리 사회는 노인들의 경제적 빈곤과 노후대책에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 이상으로 심각한 노인문제는 계층과 경제적 여건에 관계없이 개개인의 내면적 정신의 쇠락이다.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스스로 존재감을 상실하는데서 노인의 삶은 황폐화 된다. 주인공인 윤금숙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의 할머니이다. 치매환자는 지금 세상 밖으로 떠밀리면서도 삶의 끝자락을 놓지 않고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치매환자에게도 80년 인생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살아있는 한 그녀는 세상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암흑 속으로 가라앉는 것은 이 세상이다.  

 

 

 

 

나의 첫 번째 실험작이 완성되기까지...... 작가의 말 - 오증자
우연한 기회에 한 노인과 식탁에 마주앉은 일이 있다. 겉보기엔 단정한 보통 할머니였는데 이쪽에서 인사를 건네도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상대방을 경계하는 듯 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치매라고 했다. 그 눈에서 섬뜩하리만큼 처연한 소멸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저 치매환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폐기된 그녀의 존재감은 서서히 실종되고 있다.
나의 상상력은 지난 한 세기의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 평범한 여성이 살아온 80년 인생의 궤적을 더듬어 본다. 그녀는 분명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말하고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게 하고 싶다. 어둠속에 켜켜이 묻혀있는 기억들을 끌어내어 때로는 속삭이고 때로는 외치며, 자신을 향해, 살아온 모든 세상을 향해... 말하고 또 말하게 하고 싶다. 기억만이 살아있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러다가 마침내는 아름다운 기억들 속으로 실종되게 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의학적인 접근이나 해석에는 의존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이 작품은 나의 첫 번째 희곡이다. 배우 손숙씨가 이 이야기를 희곡으로 쓰게 한 동력이 되어주었다. 연기 50년의 경륜과 그녀만의 섬세함, 우아함, 강인함 등이 이 작품의 주인공을 최대한으로 승화시킬 수 있고, 반세기를 넘게 내 생의 동반자인 연출 임영웅씨가 예상치 못했던 이 무모한 실험작을 완성시켜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오랫동안 산울림의 무대를 빛내준 박동우, 김종호, 박혜선씨 와 서은경, 박윤석, 김지은 그리고 모든 스텝들이 79세 노인의 데뷔작에 선뜻 동참해준 우의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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