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
할머님을 생각하며 이 글을 적습니다. 당신도 과부 몸으로서, 30에 청상이 된 자부와 2대독자인 손자 하나를 데리고 집안 지키며 사시느라고 참 고생고생도 많았습니다. 그 “거미 같은 새끼”가 미련한 머리로 글 한 편을 꾸며서 어쩌다 보니 '굿'이 되어 국립극장 큰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제 당신은 홀연히 지난봄에 귀천하고 아니 계십니다. “할무니, 내가 쓴 글이 굿으로 맹글어졌대” 하고 말씀하면, 당신께서는 뭣이라고 대답하실 지요.
'징비록'은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冊名이다. 그 '指定文化財 解說書'에 보면, '本冊은 서기 1592년 이조 宣祖時 영상으로 계시던 西里 柳成龍 선생이 임란을 전후하여 기록한 문서 중의 하나로서, 가장 대표적이고 사학연구에 基本資料가 되는 귀중한 책이다 이 징비록 초本은 임란常時의 昭詳한 정세를 기록한 任亂史記 문서이다." 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책은 名 宰相의 말년의 政治回顧錄이자 허심탄회한 참회록인데, 여기서는 참혹한 壬辰兵亂의 원인과 戰況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에 作者는 7年 大戰의 영상으로서 內政과 外交 軍事 등 대사를 한손에 쥐고 끝까지 요리해 갔던 유성룡을 통하여 임란을 照明해 보고 아울러 그의 인간상의 편린을 찾아보고자 한다.
作者는 壬亂을 다룸이 있어 두 가지 점을 분명히 했다 그 하나는 黨爭問題이며, 다음은 사대 외교 론이다. 굳이 植民地史觀까지 들춰낼 것은 없고 당시로서는 적어도 朋黨論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 것 같지는 않다. 가령 亂前에 있었던 日本通信史의 歸國報告 문제, 亂中의 임금님 播遷 길에 대한 함경도行과 義州 行의 兩論, 그리고 곧 이어지는 중국 땅에의 内附論에 대한 反對, 李舜臣에 대한 유성룡의 철저한 信任(이순신의 고향은 흔히 西人이라 일컬어지는 李栗谷과 같은 德水이다) 등등을 보면 그들은 黨派性이기 보다는 국사를 대하는 떳떳한 태도와 인간적 選好가 앞서 있었던 것이다. 後代에 와서 顯宗朝의 服喪으로 야기된 禮문제가 일어나고부터는 별문제이겠지만"그리고 언필칭 '依他的'이라느니 '非自主性’이라느니 하는 왜곡된 事大主義를 여기서 우리는 그 眞面目을 보는 것 같다. 특히 유성룡의 對明外交 수완은 눈물겨운 바 있다. 歷史의 거울이란 말을 원용해 볼 때, 4백 년 전이나 이제 나 우리의 국제상황은 별로 달라져 있지 않다. 어느 美國人 대학 교수가 한국 국민은 굉장히 우수하고 自主性이 강하며 역사적으로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自己民族을 지켜 왔다고 칭찬하면서, '그들을 사대주의라고 하지만 그 사대주의라는 것은 주변의 대국 속 에서 살아남는 政治的인 슬기였다' 고 한 말은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한 門外漢으로서 우리나라 歷史를 읽다 보니 역사를 假說하고 싶은 소박한 마음이 자주 일어난다. 그 옛날 三國을 半島의 남쪽에 치우쳐 있던 新羅가 통일할 일이 아니고 차라리 고구려 쪽이었더라면 하는 흔히 있는 얘기로부터, 亂初에만 해도 중국 군사가 평양성을 일거에 탈환한 후에 그대로 직행하여 서울을 깨쳐 허리를 잘라 버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되면 함경도로 나아갔던 倭將 가토는 오도 가도 못한 채 退路가 끊기고 남쪽의 고니시도 힘을 잃었을 것이며, 따라서 日本軍의 섬멸은 시간문제, …… 그렇게 길고도 긴 7年 戰爭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기야 우리의 초라한 軍勢는 생각지 아니하고 말이다. 이 미중유의 국난 후로 그러니까 불과 40년도 채 못돼서 우리 는 또 한 번 丙子胡亂의 三田渡 굴욕을 맛봐야만 했다. 그 사이 朝野 上下 爲政者와 百姓은 무엇들을 했단 말인가. 그저 國運인가. 歷史의 恨이 어찌 하나 둘뿐이랴!
임란 때 재상으로서 폭풍우로 가라앉는 나라의 배를 살려낸 명선장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극화한 것이다 1,2부 총 13장에서 장 종장을 포함한 상당한 분량으로 1592년 임진년 개성의 행궁으로부터 유성룡이 죽기까지 15년간을 다루었다. 거의 연대기적으로 전쟁의 경과와 국정에 대해 진술한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극적행동은 미약하다.
이 작품은 유성룡이 주인공으로 개인 유성룡의 인물됨을 그리려는데 역점을 두었고 이따금 개인에 관한 대화가 있긴 했지만 워낙 방대한 사건과 무수한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어 혼란스런 느낌마저 들고 그만큼 유성룡의 묘사는 완벽하지 못한 느낌이다. 2부 후반을 제외하면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적 사실과의 구분이 힘 드는데 오히려 '징비록'의 행간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유성룡의 참모습을 찾아 표현했어야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성룡이 영의정올 물러나 피신한 어머니를 만나는 거의 끝 장면 이후에서야 이 작가의 특유한 서정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전체적으로 드라마틱하지는 못하지만 임진왜란의 참상이 어떠했던가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 그리고 다른 대부분의 희곡들과는 달리 격식과 품위를 갖춘 그의 문체와 어조가 매우 좋다. 좀처럼 해설 장면을 두지 않는 그의 극작법과는 달리 서장으로부터 여러 장에 해설이 등장하고 있는데 종장의 왕의 소리는 서장의 해설과 앞뒤 짝을 이룬다. 그러나 중간의 해설들은 시간의 경과와 상황의 변화를 지시하는 낭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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