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전진호 '인종자의 손'

clint 2015. 11. 12. 09:39

 

 

 

'인종자의 손'(1970)은 작가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재공연 된 작품이다. 국립극단에서 1970년과 1973년 임영웅 연출로, 1986년에 또 다시 이해랑 연출로 막을 올렸다. 1986년에 막을 올릴 때, 작가는 미국에 거주할 때여서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 궁금하지만, 1970년대 초와 1986년의 시대 상황과 당시 국립극단의 레퍼토리 선정의 흐름을 살펴볼 때 전진호의 작품이 국립극장 무대에 올라갔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특히 1986년 전두환 정권이 간접선거로 정권 연장을 꾀하고 있을 때, 전국적으로 여러 계층의 다양한 집단이 호헌 철폐 서명을 벌일 때, 과거의 기억의 상처를 다루고 화해와 용서, 그러나 아직도 해결할 수 없는 강요된 죽음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한 작품이 국립 공연단체의 정식 레퍼토리로 올려졌다는 사실이 당대의 아이러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대는 김형국 교수 저택의 거실. 사학자 김형국은 93세의 할아버지 김주열과 헌신적인 아내, 2남 1녀와 함께 살아간다. 때는 4.19 혁명이 일어 난지 1년이 지난 1961년 4월 중순. 한창 개나리, 진달래가 피어오르고 4.19 혁명의 열기가 한창 새로운 사회변화를 요구하고 있을 때, 이들 3대의 가족에게는 암울한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구한말 조선왕조의 신하였던 할아버지 김주열은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에 학병으로 자원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자신의 둘째아들 형식을 아직도 기다린다. 삼촌과 함께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원자병을 얻어 귀국한 김형국의 큰아들 동원은 자신을 학병으로 보낸 아버지 김형국을 원망하며 세상과 단절한 채 방에만 틀어 박혀 지낸다. 6. 25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온 김형국의 둘째아들 동호 역시 기회주의적 선택 때문에 괴로워한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가족의 이야기가 암울한 분위기 속에 전개된다. 가족 가운데 과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은 오직 젊은 세대, 막내아들 동수와 외동딸 은주뿐이다. 막이 오르면 김형국은 거실에서 아내와 막내 은주와 함께 방에만 틀어박혀 음악을 듣다가 음반을 깨부수어 버리는 큰아들 동원을 걱정한다. 막내딸 은주는 가족이 과거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이 집안의 모순을 비판하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변명으로 딸의 항변을 무마한다. 잠시 후, 형식의 약혼녀였으나 지금은 수도원에 들어가 살고 있는 은경이 형식이 사용하던 바이올린을 빌리러 방문한다. 윤경과 함께 이들을 방문한 최치석은 김형국 교수와 함께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슬픈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본다. 며칠 후 은주는 아버지 조교 윤종구로부터 아버지가 의문의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갔다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김형국 교수는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와 쓰러져 의사의 진료를 받고 있기에 은주와 어머니 한 여사는 아버지의 행동에 의문을 품는다. 동원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가운데 할아버지가 둘째 아들 형식을 찾는 신음소리도 고조되어 간다. 술이 취해서 들어온 둘째 아들 동호는 자신이 기회주의자가 된 건 부모 탓이라며 부모를 원망 한다. 동호는 6.25 전쟁을 피해 미국유학을 보낸 아버지를 비난하지만, 아버지는 전쟁을 피하려고 유학을 보낸 게 아니라 애국하는 다른 방법을 택하려 했다고 동호를 위로한다. 할아버지 김주열은 학병에 끌려간 둘째 아들 형식의 환상을 보게 되고 통소를 불자 하인 송영달은 탈춤을 춘다. 김주열은 일본에 협조하지 않는 자신을 감옥에 집어넣으려는 일세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동생과 들을 대신 학병으로 보내게 만든 김형국을 비난하며 형식은 꼭 살아 돌아온다고 주장한다. 형국은 아버지의 비난을 묵묵히 참으려 한다. 이때 동원이 아버지가 젊은이를 학병에 나가라고 연설을 하러 다닌 사실을 말하며 아버지를 공격한다. 김형국은 동원의 비난을 참고 견디며 당시의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을 변명한다. 김형국은 더 나아가 학병에 끌려가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의 피해로 죽은 줄 알고만 있는 형식이 죽은 게 아니라 화상으로 엉망이 된 상태로 돌아와 송장처럼 살아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동원은 아직도 형식을 기다리는 할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다그치지만, 김형국은 형식을 두 번씩 죽일 수 없다는 말로 동원에게 이해를 구한다. 동원은 그제야 아버지의 깊은 고뇌를 이해하게 된다.
김형국은 병을 얻게 되는데 약을 구할 수 없어 시한부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병원에 다녀 온 작은 아들 동호는 형 동원에게 아버지의 사정을 알리고 아버지와 화해하라고 권한다. 마침내 동원은 아버지를 부축하다가 아버지를 끌어안고 용서를 구한다. 이때 형식이 사용하던 바이올린을 빌려간 윤경이 형식의 죽음을 알린다. 이들 가족에게 전달된 유서와 같은 메모에서 형식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강한 의문을 전달한다.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불러대는 삼촌의 이름을 들으며 형식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작품은 첫 장면에서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암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한다. 작품을 끌고 가는 큰 사건은 없는 듯 보인다. 원자 폭탄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형식이 사실은 불구가 되어 돌아와 생을 연명하다가 죽은 사건, 형식의 임종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약혼자가 바이올린을 빌려갔다가 돌려주는 에피소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동원의 변화 정도가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작품을 끌고 가는 동력은 사건의 해결이나 문제의 해 결에서 나타나기보다, 가족 구성원의 가슴 아픈 상처를 서로 이해하게 되는 등장인물들의 고백에서 나타난다.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어려운 것이나, 상처를 드러내는 용기 있는 아픔을 겪을 때에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등장인물은 고백을 통하여 웅변으로 입중하고 있다.
비록 아버지 김형국과 큰이들 동원이 화해를 했고 젊은 세대인 동호, 동수, 은주가 가족의 문제를 '수술'하였다고 해도 그 수술은 현재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나려는 시작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치유에 해당하는 역사의 짙은 먹구름을 걷어내는 건 여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약혼자 윤경이 켜는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눈을 감았을 형식은 자신의 임종을 가족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이 죽음의 소식이 전달되는 순간, 옆방에서 할아버지 김주열이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처절하게 들려온다. 할아버지의 졸도 소식이 전해진 후에 죽은 삼촌은 소리의 형태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남은 가족에게 전한다.
모두의 표정이 굳어진다. 동원은 자신을 이겨내기라도 할 듯 수첩을 편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동원의 수접 든 손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형식 (소리>이제 나는 파멸의 뜰에 와 있다. 공포와 초조와 긴장의 문턱을 지나 죽음의 시간에 와 있다.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왜 죽음은 내게 두 번씩이나 오는 것일까? 왜 죽음은 두 번씩이나 오는 것일까?
폭음이 높아지며 소리의 소리를 삼켜 버린다.
동원의 손이 떨린다.
수첩이 떨어진다.
불이 꺼진다.

 

 

 

전진호가 던지는 시대에 대한 목소리가 바로 형식의 진문에 들어 있다. 작가는 죽음을 두 번씩이나 맞아야 하는 이들이 던지는 의문에 답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를 애타게 호소한다.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과거사 청산의 문제가 아닐까. 가족의 화해만으로 이해와 용서만으로 끝날 수 없는 역사의 아품은 소리의 소리마저 삼켜 버릴 만큼 커다란 폭발음으로 처리하고 있다.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허무로 끝나 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문제 제기는 했으되 방법이나 방향을 찾지 못한 작가의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결국, 그 문제의 해답은 여전히 살아남은 다들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1966년<밤과 같이 높은 벽>에서 보여주었던 낙관적 희망이 왜 1970년<인종자의 손>에선 왜 이리도 비관적 절망으로 바뀌었을까. 4.19 혁명의 좌절과 5.16 군사쿠데타로 인한 수술의 좌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런 굴절을 겪으며 작가는 태평양 건너 미국을 동경하기 시작했던 건 아닐는지.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미지의 세계를 동경할 때 현세의 삶은 부조리하게 보일지 모른다.<들개〉의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작가는, "일찍이 한 때 나는 모든 것을 잃고 살아왔다… 그리고 방황이라는 내기에 나를 걸고 위태로운 생을 지켜왔다. 끝없이 파고드는 실의의 바람, 실상 나는 '떠돌이 별'이었다. 이제 내겐 무서운 내적 체험이 남아 있을 뿐, 잃어버린 때(時)를 찾아야겠다.”라고 다짐했지만, 때로 전진호는 현실에 냉소와 엉뚱한 반응을 던진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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