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전진호 '밤과 같이 높은 벽'

clint 2015. 11. 12. 09:33

 

 

 

 

 

<밤과 같이 높은 벽>은 1966년 국립극단 희곡 현상공모 당선작이다. 아마 이 작품으로 전진호는 혜성과도 같이, 아니면 야생 적토마와 같은 모습으로 연극계에 등장했을 것이다. <들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자마자 같은 해, 1966년 국립극장 장막희곡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 이는 일찍이 없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화려하게 등장한 전진호는 천년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농부의 심정과도 같았던 당대 연극계에 영원한 해갈을 가져올 역량 있는 작가로 환영받았다. 중견 연출가 허규, 임영웅, 강유정 등 당대 연출가들에게 전진호라는 신예작가는 단지 젊어서만 아니라 당대 삶의 아픈 상처와 기억을 다룰 줄 아는 작가였기 때문에 더더욱 소중하게 받아들여졌다.

 

 

 


전쟁의 상처를 다루고 있는 '밤과 같이 높은 벽'의 무대는 석윤경 여사의 집 거실. 시대 배경은 1959년 겨울에서 I960년 4월까지. 석윤경 여사는 죽은 남편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3남 2녀를 데리고 살고 있다. 첫째 아들 주지섭은 6.25 전쟁의 상처로 고막이 터져 듣지 못하는 장애자다. 그는 방에만 처박혀 신음소리로 가족을 괴롭히는 존재다. 둘째 아들은 외항선의 선장으로 바다에 나가 있다. 큰 딸은 전쟁에 약혼자를 잃고 혼자 교회에만 다닌다. 셋째 아들 용국은 미국에 가려고 여권이 나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 넷째아들 동익은 시인이고, 둘째 딸이며 막내인 은실은 대학생이다.
막이 오르면 석윤경 여사는 대관령에 스키를 타러 간 막내딸 은실과 바다에 나가 석 달째 연락이 없는 둘째 아들 석빈을 걱정한다. 첫째 아들 주지섭의 신음소리에 석윤경은 과거의 아픈 기억에 고통스러워하고 동익은 어머니의 걱정에서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걸 눈치 챈다. 대관령에서 돌아온 은실은 집안 분위기를 걱정하고 오빠 동익과 함께 집안의 분위기를 수술하겠다고 다짐한다. 또한 이들은 지섭의 아내 남정옥이 이상한 행동을 하자 아이를 가졌으리라고 짐작한다. 술에 취해 들어온 셋째 아들 용국은 동생들에게 어머니가 들려주는 아버지의 과거가 허위라고 털어 놓으며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비겁한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용국은 남정옥이 밴 아이에 대해서도 진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가 용국은 교회에서 돌아오는 누나 은혜에게도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용국 형의 말을 듣고 동익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추궁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 석윤경 여사는 이들에게 이상한 말을 늘어놓은 용국에게 진위를 물어보지만, 용국은 자신에 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다. 곧 이어 석빈이 도착 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교회에서 돌아온 은혜는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었던 꿈이 깨진 심정을 털어놓는다. 밖에 외출했던 가족이 하나 둘 들어오는 가운데 석빈이 오랜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온다. 석빈을 환영하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큰형 지섭이 나타남으로써 깨어진다. 지섭의 아내 남정옥은 석빈과 단둘이 남게 되자 석빈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린다. 석빈은 유산을 권하지만 남정옥은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한다. 한밤에 지섭이 혼자 등장하여 아버지의 초상화 앞에서 세상을 하직하려는 심정을 털어놓는다. 형의 죽음 앞에 괴로워하는 석빈에게 용국은 어머니의 불안을 털어 버리기 위해 집안의 분위기를 수술하겠다는 결심을 털어놓는다. 이울러 은혜 누나의 고통이 약혼자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 동안에 순결을 짓밟힌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힌다. 이 사실을 몰래 엿들은 동익은 은혜에게 사실 여부를 타진하지만 은혜는 완강히 거부한다.
석빈은 다시 긴 항해를 떠나기로 하고 은혜에게도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과거의 기억을 잊으라고 권한다. 어머니가 석빈의 태도를 못 마땅하게 여기자, 용국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과거와 은혜 누나에게 얽힌 사건을 털어놓는다. 용국은 은혜의 약혼자가 남긴 일기를 찾게 되어 진실을 폭로한다. 이들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말한 것과는 달리 전쟁에서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은혜의 순결을 희생시킨 사건이 들추어진다. 용국은 여권이 나왔으나 미국에 가는 걸 포기한다. 남정옥이 아이를 낳을 때가 되자 용국은 이이의 아버지가 누구인 지 밝힌다. 아울러 동익은 누나 은혜도 진실을 마주 대하며 살라고 다그친다. 용국의 친구 신문기자 최필수가 찾아와 석빈의 배가 침몰 한 뉴스를 전해준다. 가족은 석빈이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들의 불안은 남정옥의 아들 순산으로 기쁨으로 바뀐다. 용국은 건강하게 울리는 아이의 울음을 들으면서 집안 분위기 수술이 완전히 끝났음을 선언한다.

 


'들개'에서 남겨진 과제, 즉 살아남은 자의 과제는 '밤과 같이 높은 벽'을 부수는 것이다. 장벽을 부수는 일을 작가는 '수술'이라고 소개한다. 과거의 기억에 눌려 상처를 돌볼 줄 모르는 새 공포처럼 무거운 집안 분위기를 수술할 사람은 오직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스러운 '젊은 사자들'뿐이다.
동익 : 넌 지금 누구를 심판하는 거냐?
은실 : 심판이 아니라 수술하자는 거죠.
동익 : 수술?
은실 : 네.
동익 : 넌, 마치 이번 여행에서 우리 집이 썩어가고 있는 환자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로구나.
은실 : 전쟁에서 받은 상처는 아주 잘라 없애자는 거예요.
동익 : 그래?
은실 : 물론 어렵고 힘든 수술일 거예요. 그렇지만 언젠간 받아야할 수술 아네요?…

 

 

 


이들의 수술은 성공한다. 작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희망적이고 밝게 막을 내리는 작품은 이 작품뿐이다. 아마 작품의 배경이 4.19 학생의거를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등장인물 가운데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시위대의 대학생이 등장하도록 쓰인 걸 보아도 당시 젊은 작가의 시대적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희망은 바로 용국의 마지막 대사, 작품의 막이 내리는 다음과 같은 대사에 담겨 있다.
용국 : (천천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수술은 완전히 끝났어. 완전히. 이렇게 많은 희생과 수난을 겪으면서 얻은 우리 형제들의 후예의 울음을 난 언제까지고 듣고 싶다. 고래의 울음 같은 저 아이의 울음을. 그리고 난 우리들의 후예에게 가르치겠다. 우리 형제들의 피가 흐르는 저 아이에게 말해주겠다. 모래와 물의 긴 인내를. 긴긴 인내를. 밤과 같이 높았던 벽을…

 

 

작가의 글 - 전진호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이 우리들에게 남긴 커다란 상처를. 이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우리들의 가슴에 먼저 죽어간 사람들의 아픈 기억을 늘 일깨워 주고 있음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렇다. 말없이 숨져갔던 우리들의 이웃들, 그들에게 나는 무언가 말해 주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였다는 책임을 느꼈다. 설사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문제, 해결하여야 할 문제들을 미처 해결하지 못했다 하여도 그것은 곧 나 그리고 우리들의 책임이 아닐까? 움직이는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보다 강하다는 것을 일찍이 나는 배워왔다. 결코 오늘에 머물어있지만은 않은 우리들, 우리들은 움직인다. 그러나 너무 많은 수난을 겪어 온 우리들, 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서 있음을 느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수없는 세월을 눈물로 살아온 사람의 얘기를, 아니 이 스쳐간 뒤에도 살아야하고 후손들을 위해서 희생되어야 했던 사람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눈 꿈꾸고 있었다. 來日은 밝아질 게고 어두웠던 날들은 이미 우리들의 긴 인내 앞에 빛을 줄 거라고. 그렇다, 용기는 항상 뭔가 먼저 줄 것이 아닌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집념을 무기 삼는다면 고래는 반드시 잡히지 않을까? 고래야말로 우리들이 目的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쓰고 싶었다. 영원으로 행할 우리 모든 젊은이의 자세 고래를 잡으려고 움직이는 젊은 자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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