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세혁 '홀연했던 사나이'

clint 2024. 6. 25. 11:38

 

 

 

극은 지루한 일상이 이어지는 시골의 한 지하다방에

미지의 사나이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사나이는 엽차를 주문한 채 글쓰기에 몰두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때 사나이는 초등학생 승돌이에게 시나리오 한 장을 건넨다.
몇 마디 대사로 연기의 매력에 빠져든 승돌이는

다방의 최양과 연기 연습에 몰두한다.
이후 사나이는 두고 간 시나리오를 찾으러 다시 다방에 온다.
그에 대해 호기심을 품은 마을 사람들은 사나이에게 이곳에 머물라 하고,

사나이는 다방에 모여든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구상한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완성해가던 어느 날 사나이는 홀연히 사라진다.
마담과 다방레지, 퇴직을 앞둔 교감, 절름발이 배달원, 비전 없는

부동산 중개인 등 다방에 모여든 이들은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삶의 생기를 잃지 않는다.

 

 

 

 

 

"어느 위대한 작가가 얘기했지. 사람들에게 환상을 제거해서 오로지 현실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면, 사람들은 행복하겠느냐고. 꿈이 꿈인걸 알면서도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걸지도 몰라. 사람들도. 나도."
- 사나이의 대사 중.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삶이 별 볼일 없다 생각한다.
점점 똑같은 하루하루에 지쳐가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였는지, 어떠한 꿈을 꾸었는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어떠한 열정과 패기를 가져왔는지 잊어간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그들에게

홀연하게 나타난 사나이가 잃어버린 꿈을 찾게 해줄 수 있을까?

 

 

 

 

 

작가의 글 - 오세혁
대본에 잠시 언급을 한 바와 같이 홀연했던 사나이는 제 어린 시절에 겪은 실화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다방을 운영하셨는데 언제부턴가 낯선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엽차 한잔만을 시키고 다방에 계속 죽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나이는 항상 두툼한 종이뭉치를 읽고 있었는데 저는 그 종이뭉치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나이는 주변을 서성거리는 저를 부르더니 종이뭉치의 한 대목을 가리키며 읽어보라 했습니다. 그 종이 뭉치는 영화시나리오였던 것입니다. 저는 분명 어색하게 읽었는데 그 사나이는 저를 엄청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부르더니 자신은 어떠어떠한 영화의 조감독이며 캐스팅 담당인데 우연히 들른 다방에서 순돌이를 능가할 만한 소년을 찾아냈다며 저를 키워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입이 벌어지셨습니다. 그 후로 저희 어머니는 그 사나이에게 공짜 커피를 대접하였고 그 사나이는 저를 불러 시나리오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지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그 사나이는 제가 아닌, 다방 누나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뒷전으로 제쳐두고 다방 누나들을 불러 여주인공 캐스팅을 하고 있는데 테스트를 해보겠다며 차례대로 읽어보게 했습니다. 당연히 다방 누나들도 입이 벌어졌고 그 이후로 앞 다투어 사나이에게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사나이는 공짜커피를 잘 마셔가며, 또 다방 누나들에게 술도 얻어먹어가며 당당하게 다방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나이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공짜커피와 술과 라면을 대접했던 우리 어머니와 다방 누나들은 너무 황당했습니다. 역시 그놈은 사기꾼이었다며 투덜거리는 어머니의 분노와, 사나이를 두고 경쟁한 누나들의 민망함과, 참으로 재밌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 사나이가 사기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사기꾼으로만 생각해야 하는가. 짧은 시간동안 우리 모두는 ‘강렬한 예술적 체험’을 하지 않았나. 그 사나이가 아니었다면 시골 다방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누나들이 어떻게 ‘영화의 꿈’을 꾸어볼 수 있었겠나, 라는 생각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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