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제임스 얼버리 '두 송이 장미'

clint 2024. 6. 16. 10:20

 

 

한 가난한 신사 그랜트가 두 딸을 위해 희생되더라도

딸들은 잘 키우고 좋은 신랑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할 계획도 세운다.

두 딸인 아이다와 로티는 철부지로 장미꽃처럼 키워지나

이젠 마을의 칼렙과 와이어트를 흠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운다.

이 그랜트의 집에 유산 변호사가 찾아오는데

귀족의 친척의 1순위 상속자가 나타나지 않아

거대한 유산이 상속됨을 알린다.

2막은 졸지에 부자가 된 그랜트가 두 딸을 가난한 청년들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막아 이 젊은이들의 사랑과 좌절이 재미있게 펼쳐지고

3막에서는 그랜트의 멋진 별장에서 벌어지는데

1순위 유산 상속자를 찾게 되어 그만 재산을 모두 돌려주게 되고

그 상속자는 바로 칼렙으로 밝혀지고

딸들은 본인이 원한 데로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제목 '두 송이 장미'(Two Roses)는 그랜트의 두 딸을 의미한다.

 


 

제임스 얼버리 James Albery (1838~1889)
42세라는 나이에 요절한 T. W. Robertson은 선각자들이 이미 웨일즈왕자 시절에 로버트슨 작품의 촉망을 예측했던 영국극단의 풍성한 수확의 소출을 강탈해버렸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세대에서 제임스 올버리는 극작가로서 그의 제자라고 불리울만 했다 (길버트는 제작자로서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지만), 그리고 올버리의 작품은 상당량이 로버트슨의 것과는 무관한 바… 'The risque Pink Dominos'(1877)과 기타 여러 가지 실패작이었던 시극들이 있다. 그렇지만 '두 송이 장미'(1870)만은 전적으로 로버트슨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이 작품은 솜씨의 우아함, 무대효과의 정교함'그리고 여주인공들의 이원성(감상적인가 하면 감미롭고, 한편 밝고 쾌활하다) 마저도 'the Bancrofts'와 같은 로버트슨의 작품의 특징을 띄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송이 장미'는 디그비 그랜트 역에서 젊은 헨리 어빙이 제공하는 인상이나 영향은 미치지 않고 있다. 이 비열하고 그럴싸한 사기꾼은 어빙의 손으로 젊은 헨리어빙이 제공하는 인상이나 영향은 미치지 않고 있다. 이 비열하고 그럴싸한 사기꾼은 어빙의 손으로 젊은 Mathews 의 'Charles Coldstream in Used up'이나 Sothern의 'Dun dreary J.L. Tool의 'Paul Pry'와 대비할만한 빅토리아 왕조 무대의 위대한 희극창작가중 한 사람이 되었다. 어빙의 뒤를 이어 승리는 주로 불길한 작품 권에 드는 (Mathias in the Bells, Dubosc in the, Lyons Mail, Mephistopheles)나 역사물(Charles I, LouisXI, Becket)에 있는데,'The Pickwick Papers'에서 개작한 올버리 의 작품 중 또 하나인 'Jingle'과 '두 송이 장미'에 보여주는 그의 희극적인 재능을 떠올려봄도 시기적절한 것이다. Robertson의 생애처럼, 그의 제자의 생애도 조숙한 요절로 끝났다. 올버리가 초기의 성공을 지탱할만한 정력을 가졌더라면, 영국 극의 르네상스는 로버트슨 류의 레퍼터리의 출현과 웨일즈왕자 시절의 대 조화를 이룩해 성세를 누렸을 것이나, Pinero, Jones 그리고 Oscar Wilde의 원숙기가 도래하기까지 30년간을 더 기다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올버리의 작품들은 Dr. Davy(1866), 두 송이 장미(1870), Pickwick(1871) 그 후 Jingle로 개작됨 (1878), The Pink Dominos(1877), '위기'(1878) 및 '의무'(1879)가 있다.

 

 

근대 영국 희곡 해설 - 역자의 글

많은 신간서적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유난스럽게도 이 땅의 戯曲分野의 전문서적이나 교과서는 유례가 없이 한산하고 가난하다 못해 한심스런 지경이다. 금번 가장 역사가 깊다는 英國劇 가운데서도 近代로 연결 접합되는 19세기 희곡을 처음 한국 극단과 희곡 계에 선보일 수 있음을 퍽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옥스퍼드대 留學 길에 보내 온 이 귀중한 資料는 조지 로월이 再版 편집한 19세기 영국 대표 극으로 아직 한 번도 한국 극단에 소개된 적이 없는 3막 및 5막극으로 우선 姜正錫교수님께 감사드린다. 19세기 英國劇의 극적 가치에 대한 견해가 저마다 다르다할 지라도 빅토리아 시대는 주지한바와 같이 근대극의 출현기로 봐야한다. 연극 배경장치가 상자무대화 했고, 전등으로 조명을 한 프로시니엄 아취로 치장된 무대가 굳혀지던 무렵, 이런 무대의 발전은 여기서 소개하는 영국 극을 참고하지 않고서는 연구가 불가능하다. 가령 영국 낭만 극은 상대적으로 프랑스나 독일 낭만 극에 대비해서 너무 소홀하게 평가되지 않았나 싶다. 연극학도들에겐 일례로 사상 면에서 버나드쇼 학파나 오스카 와일드 극문학 파에서 지적할 수 있는 바처럼 그 기대치는 훨씬 못하고 있는 데, 와일드는 그의 탄생 보다는 우연한 요절 때문에 19세기 극작가 대열서 열악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연극학도를 위해 영국극의 연보나 연대기를 제시해 은 폭넓은 관심사가 되기 마련이다.  중세나 엘리자베스朝, 近代 아니 어느 시대에도 연극대중의 요구사항을 전적으로 사로잡지는 못했다. 특히 빅토리아 朝 관객의 취향인즉 "관객을 흥겹게 해다오 그렇잖으면 몽땅 박살나고 말아 끝장나는 형색" 인데다가, 배우나 가수들은 물론 마술가, 무대장치가나 연출가 혹은 각종 극작가라 할지라도 자기네들 목소리를 유의해나가지 못하면 굶어 죽기 마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놀라운 것은 대부분 극작가들은 자신의 업적이 미미한 사실 보담 소망하고픈 목표를 달성코자 했다는 사실이다. 연극적 맥락에서 볼 때 19세기 영국 극을 재평가함에 따라 近 대서양을 중심하여 양분된 구라파의 직업극과 미국의 교육극이 두드러지게 관심사가 되어 극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경향이다. 일례로 Dion Boucicault작품의 英國劇의 목하 재평가는 장차도 그렇기를 바랐지만 영어권을 통 털어 빅토리아 朝 극 레퍼토리를 음미코자 하는 다수 극단들을 선도해나갈 것은 자명하다. 이 극본들이 증가추세인 현황은 특기할 만하다. 만약 기교면에서 더욱 날카롭게 다듬고 가꿔져 어떤 극작품이 공연되어지되 직업 극단의 연출로 형상화되어야 할 작품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빅토리아朝 劇들이다. 설령 최근 발간되는 작품에서 보는 때로 인쇄술의 빈약에서 기인되기도 하나 극작품이란 그 자체가 배우들을 위한 것이든 극단들을 위해서든 노상 배우들에 의해 좌우되지만 결국 읽기 위한 문학작품이 아닌 무대公演을 위한 대본임은 틀림없다. 당시 관객들은 극작품 보다는 배우들에게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그런 관객의 외도에 맞춰 빅토리아 朝 대중의 정황은 극적 찰나의 명분 속에서 전폭적으로 삶의 환상을 만족시켜 추는 것들을 창조했다. 결국 점잖은 대중은 관극행위나 극작품 읽기를 포기한 대신 소설을 택했다. 이런 변화는 19세기 무대지문들에 나타난 은밀한 반 계몽주의자들의 언어 가운데 스며들어 나타났다. 빅토리아朝 劇을 재평가 하려는 운동에서 획득한 상당한 추진력은 전세대의 주제를 등한시한 반동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렇지만 또다른 要因은 과거 20년간 걸쳐서 세계적 여흥꺼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현상들인 그 시대 주제의 유사성에도 말미암는 것이다. 즉 저항할 길 없는 대중매체인 텔레비전 출현 따위다. 19세기 劇처럼 텔레비전은 누구에게나 만능이었으나 만인 이 공유한 오락물이면서도 어쩔 수 없는 빅토리아 朝 생활조건 때문에 많은 한계점을 거느리고 있었다. 드라마에 관련되는 한 그런고로 텔레비전은 빅토리아 朝 관객의 취향에 연관되어 흥미를 돋우었고 폭넓은 대중매체 수단으로 규정되었다. '진지한 연극'이 유행하면서도 이를 능가하는 喜劇이나 笑劇物에 관객이 몰리는 추세 가운데서도 선정극의 테두리 속에 드는 이번 가려진 작품들은 비교적 단순한 취미를 누리던 시대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여 가물거리며 꺼져가는 喜劇을 殘命케 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더러는 인기 있는 빅토리아 朝 극작가며 창작가인 W.S. Gillert을 배제시키는 경우가 있지만 Sullivan과 의기양양한 동반자인 Gillert는 와일드와 더불어 당대 무대를 지킨 영국 극작가였다. 엄격한 의미에서 Savoy 오페라단은 연극을 하는 단체는 못되었지만 Gillert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단체이기도 하다.

 

James Albery 의 The Pink Dominos(1877)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