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미우라 시온 원작 강현주 번안각색 '배를 엮다'

clint 2023. 9. 5. 16:52



무대는 어느 출판사의 사전 편집부. 책상마다 사전이 수북했다. 이 연극은 인터넷과 모바일 사전에 밀려 사라지고 있는 종이 사전 편집자들이 주인공이었다. 사전 출간은 단행본⋅잡지와 달리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거꾸로 말하면 인기가 없고 존재감도 없다. ‘배를 엮다’는 일본에서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받은 미우라 시온의 소설이 원작이다. 연극은 사전 편집자들이 10여 년에 걸쳐 ‘대도해(大渡海)’라는 국어대사전을 새로 엮는 과정을 따라간다. 

 


1996년 선경 출판 사전 편집부는 새로운 국어 사전 '대도해'를 준비한다. 정년을 앞둔 희권은 새로운 사전 편찬자를 찾지만 전자사전이 도입되는 시기에 사전 업무를 맡아줄 이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구내식당에서 국어사전을 보고 있는 영업부 성완을 발견한다. 그렇게 성완이 합류한 '대도해'프로젝트는 13년을 훌쩍 넘기며 출판을 향해 간다. 

말의 바다는 넓고 사전은 그 바다를 건너는 배다. 대도해 프로젝트는 인력 감축과 편집 중단 같은 사나운 파도를 뚫고 나아간다. 말은 해마다 태어나고 소멸하며 끊임없이 형태가 바뀐다. 완벽한 사전은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종이 사전 편집자들은 마지막까지 가능한 한 많은 말을 채집하려 애쓰고 방치된 말을 찾아내 풀이를 붙인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게 미련스럽게 보이는 세상에서 선경출판사 사전편집부 사람들은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나아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대관람차와 같이 그럼에도 에너지를 내어가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며. 그러나 이 일을 끝으로 선경출판사 사전편집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수익성에서 거의 보람을 찾을 수가 없기에. 

 

 

그러나 선경출판사 사전편집부가 사라졌다고 해서 대도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각자 하나의 대도해로서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언어를 모으는 일을 계속해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대도해가 항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항해가 항상 순조롭지만은 않고 때로는 풍랑을 만나는 등 위기를 겪겠지만, 무언가를 열심히, 성실하게 해도 센스가 부족한 사람은 조롱과 놀림을 받는 세상이다. ‘배를 엮다’는 변화에 적응하면서 책임을 다하는 일의 아날로그적 가치를 뭉근하게 담아냈다.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응원가로 들린다.

 

 



젊은 작가 미우라 시온의 베스트셀러 <배를 엮다>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강현주가 번안각색및 연출을 맡았다.
언뜻 지루할 것만 같은 사전 편집 이야기지만 작가는 지금 이 사회가 잊고 지내는 다양한 아날로그적 가치의 소중함을 리얼한 에피소드와 섬세한 감정 묘사로 녹여낸다. 지금은 무언가를 열심히, 성실하게 하지만 센스가 부족한 사람은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다. 티 나게 일하는 법 모르고, 자기 일을 묵묵히 성실하게 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런 수많은 우리에게 이 작품은 응원과 찬사를 보낸다.

 

미우라 시온

 

1976년 도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다. 자신의 구직활동을 바탕으로 3개월 만에 완성한 『격투하는 자에게 동그라미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2006년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으로 나오키 상을, 2012년 『배를 엮다』로 서점대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에서 문학성과 대중성을 대표하는 나오키 상과 서점대상을 모두 수상한 첫 번째 작가가 되었다. 2015년에는 『그 집에 사는 네 여자』로 오다사쿠노스케 상을 수상했으며, 2018년에는 『노노하나 통신』으로 시마세 연애문학상과 가와이하야오 이야기상을 수상했다. 2019년에는 『사랑 없는 세계』로 일본식물학회 특별상을 수상하고 서점대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변함없는 작품성과 인기를 입증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 『검은 빛』, 『고구레빌라 연애소동』,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등이 있다.

 

소설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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