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노을이 깔린 저녁, 한적한 항구의 유일한 포장마차에
자전거를 타고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 찾아온다.
이미 떠나버린 배를 기다리는 엉뚱한 남자 창묵은
채 끓지도 않은 어묵 국물을 맛있다며 먹는다.
포장마차 주인 유경에게는 익지도 않은 어묵이 맛있다며 먹어대는 그가 이상하다.
자전거로 슈퍼에 가다가 28년 전 약속이 떠올라 먼 거리를 왔다는 창묵은
포장마차 주인 유경과 자연스레 대화를 시작하는데.
약간은 어색하게 시작된 그와 그녀의 이야기는 서로에게 잊혀진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점차 그들의 알듯 모를 듯한 과거가 하나둘씩 드러난다.
<상선>은 이처럼 다소 미스터리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포장마차 주인아주머니와 남자의 대화는 일상적이긴 하지만, 의뭉스러운 느낌을 떨칠 수 없게 한다. 고향이 같다는 두 사람은 서로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둘의 기억은 일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의 긴장감은 이 같은 비밀스러움과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 대화를 잘 들어보면 두 사람이 모종의 전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지만, 인물들의 표정에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알아본 것 같지만,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보는 타이밍이 같지 않으며, 속내를 숨긴 채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난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인물들이 표정을 감춘 채 나누는 대화에 배어 나오는 간절한 그리움과 짙은 회한의 정서이다. 남자는 포장마차 주인아주머니와 함께 내면 깊숙이 간직해 두었음직한 기억의 실타래를 천천히, 힘겹게 풀어간다. 그리고 '술 석 잔'이 아닌 '소주 세 병'을 차근차근 다 마신 후에는 느닷없이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배를 향해 일어난다. 이쯤 되면 두 사람의 해후가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상선>은 이승의 종착지에서 이루어지는 '해원(解寃)'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두 사람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기억을 끄집어내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것은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는 방법의 일부인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여자의 시점이 강조된다. 남자도 그렇지만, 특히 여자는 둘의 관계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고, 이후 상처를 가슴 속에 깊이 파묻어둔 채 억척스럽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기억'과 더불어 '애도' 역시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거처야 할 과정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눈물을 아끼며, 절제되고 정제된 느낌을 준다. 인물들의 표정을 감춘 대화는 일상의 단면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 어떤 부분도 과도하게 부각시키지 않으며, 마지막의 이별 장면 또한 격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시청각적인 이미지나 인물들 간의 포즈를 통해 몇 차례의 포인트가 미묘하게 제시하지만 강조되어 있지 않다. 이는 두 사람이 일평생 가슴 속에서 숙성시켜 온 깊은 슬픔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상처의 근원지를 대면했을 때, 알아도 모르는 척 대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정서는 오히려 사실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의 말 - 윤지영
스물여덟, 몇 해째 살던 서울을 떠나야겠다 생각했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니 다들 어쩌려고 그러느냐 걱정이 많았다. 그때는 아직 KTX가 생기기 전이라, 기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는 데 두 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매일같이 창밖으로 보이는 고요한 풍경이, 춘천에서 서울의 외곽으로 이어지는 초록과 코발트색의 풍경이, 작가가 되고부터 더 예민해지는 감각들을 달래 주고 있었다. 「상선」은 그 무렵 기차에서 구상했던 희곡이다. 창밖은 온통 눈이 내렸고, 언제나처럼 멍하게 밖을 바라봤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오랜 기다림이, 현실에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그들의 마음이 읽혀, 나는 두 시간 반을 꼬박 울었다. 창묵과 유경은 갑자기 그렇게 날 찾아줬다. 다시 13년을 작가로 사는 동안, 많은 삶을 살았다. 차라리 작가가 아니었다면- 하고, 후회하는 날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뭐가 달라졌겠는가, 결국 창묵과 유경의 삶이 그렇게 결정되었듯이 나 또한 어떤 식이든 이 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기록하는 주인공들이 거칠고 아픈 삶을 살 때면 기록하는 이가 주인공만큼이나 고통스러워질 때면 「상선」을 꺼내 읽었다. 고요하고, 잠잠해지라, 나를 달랬다.
지면을 읽는 독자들과, 무대를 보는 관객들이 잠시나마 위로받을 수 있기를, 고단한 삶이 잠시나마 고요해질 수 있기를, 부디 「상선」이 당신들에게 그렇게 손 내밀 수 있기를, 기도한다.
상선(上船)은 '배에 오르다!'란 표현 외에도 '가장 뛰어난 선.' 혹은 '귀한 사람의 죽음'이란 의미 그리고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되다.'란 의미도 있다. 인생의 종착점에서 가슴 아린 추억을 이야기하는 남자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감추어두었던 기억을 나누어 주는 포장마차 주인. 이 둘의 이야기는 우리의 지나온 인생 속에서 가슴 한구석에 담아놓은 아련한 기억들을 살포시 떠오르게 해준다. 세상 모든 사람에겐 과거를 살아온 추억이 있고 오늘을 살면서 그것을 가슴 한편에 묻어둔 채 살아간다. 과거의 어떤 일들은 때론 풀리지 않은 오해로 인해 깊은 상처로 남기기도 하고 그때 하지 못했었던 아쉬움 때문에 미련으로 남겨지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는 단지 과거일 뿐이다. 하지만 생의 종착점에 다다를 때쯤엔 한 번쯤 뒤돌아보고 화해해야 할 일도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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