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얼(본명 엄찬성, 1947-2004)의 희곡은 절망적이고 억압적인 1970년, 1980년대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는 당시 정권의 정치적 명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억압당하는 소시민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시대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 속에서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담아냈다. 그러나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등장인물들의 탈출 욕망은 좌절되고 만다. 엄한얼의 희곡에 나타나는 허무주의적인 속성과 비탄조의 언어는 현실의 억압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강화한다. 더불어 정치적 이상세계를 향한 등장인물들의 갈망과 좌절 역시 심화된다. 엄한얼 희곡에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통제와 억압, 특히 자유롭게 담론을 양산할 수 없는 현실을 언어유희의 방식으로 조소한다는 것이다. 말을 장악하거나 몰수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엄한얼은 정치· 사회적 입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을 정신질환자로 매도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그들을 격리시키는 현실을 그려낸다. 정신질환자로 치부되어 언어를 탈취당하는 인물들은 하위주체로 소통을 차단 당한다. 엄한얼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사회 질서와 안녕을 명분으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현실과 정치 이데올로기를 강제하는 정권의 폭력성을 언어유희의 방식으로 조롱하는 것이다. 엄한얼의 희곡 창작은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정권에서 자행된 ‘검열’이라는 제약 속에서 공연 불가 판정을 받으면서까지 엄한얼은 문학을 통해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 그로 인해 그의 희곡은 독자와 만나고, 관객과 소통하거나 학술적으로 논구될 기회마저 제한당했다. 검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게 느껴지는 심의에서 공연 불가 판정을 받은 텍스트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일은 작가와 더불어 문학의 사회· 정치적 책임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70·80년대’라는 시대 지칭어 그리고 ‘공연금지 희곡’과 ‘한국문제희곡’이라는 표제어는 엄한얼이 시대와 정치적 현실을 치열하게 탐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에 경도(傾倒)된 작가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더불어 엄한얼의 희곡이 ‘심의’라는 공인된 절차를 통하여 ‘검열’되면서 시대와 사회에 대한, 문인으로서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제한받고 결국 문학적· 사회적 목소리를 억압당한 혐의를 배제할 수 없다. 엄한얼은 자유를 억압당한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는 특히 언론이 통제되는 70. 80년대의 현실에 대하여 준엄한 비판을 가한다. 당대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유포와 그것의 일방적 수용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언론을 통제했던 실상은 「망명정부 주식회사」와 「면역환자」에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엄한얼은 산재한 시대적 문제들을 자신의 희곡 안에서 풍자적으로 형상화함으로 사회와 정부를 향해 비판을 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관객과 더불어 고민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한얼은 희곡문학사나 연극사에서 한 번도 학술적 조명을 받지 못한 희곡작가였다.
당시의 많은 희곡작가가 우의적인 기법이나 전통 양식의 적극 도입 혹은 전통적인 주제의식을 표면화하는 방법으로 활로를 모색할 때에 엄한얼은 당대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직설적으로 풍자하고 조롱하는 글쓰기를 하였고, 결국 그는 자신의 창작희곡이 4편이나 공연불가 판정을 받으면서도 연극을 통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자 하였다
공연이 안된 이 작품은 이전 작품보다는 다소 정치 현실비판보다는 완화된 작품으로 5인의 등장인물이 나와 사회 전반을 진단하고 툭툭 요설처럼 내뱉는 대사가 재치있게 연결된다. 특히 뱀장수로 등장하는 인물은 뱀을 팔여 시범을 보이다가 뱀에 물려 죽는 것과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빙자해 풀어놓는 대사들은 문학적이기도 하다. 가와 나는 다시 연극판으로 돌아와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줄리어스 시저, 춘향전 등이 살짝 변형되어 재현된다. 종교문제도 다룬다. 다음의 대사에서 작가가 연극판을 못 떠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소리(가) : 춤추는 정치, 들먹이는 경제, 피 묻은 사회, 삐그덕거리는 문화 일하는 데는 병신이요 처먹는 데는 걸신이요, 도망가는 데는 귀신이요, 아첨하는 데는 유신인 그 수라장 아비규환의 틈바구니에서 목 졸리우다가 나는 드디어 연극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거기엔 나의 유토피아가 있었다. 나의 에덴동산이 있었다. 무대 위에만 올라서면 나의 온몸에 생기가 돌고, 눈빛은 광기에 어린다. (무대를 한 바퀴 돌며-) 지구는 무대, 인생은 연극, 인간은 배우, 무대 위의 현란한 스포트라이트 비치는 꿈길 속에서, 난 전쟁과 평화, 사랑과 미움, 복수, 갈등, 시기, 배신, 분노, 수치, 연민, 질투, 증오를 만난다. 그리고 신을 만난다. (사이) 연극무대! 그 위에 우리의 진정한 삶이 있기에 우린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불 꺼진 조명! 관객이 모두 떠나버린 그 무대에서 우린 우리들의 눈물로 웃을 수 있다. 좌절하기에는 우린 너무 젊다. 찬란한 슬픔, 행복한 고독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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