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정경환 '나의 정원'

clint 2018. 5. 30. 16:08

 

 

 

 

 

이 작품은 200412월에 너른 소극장에서 정경환이 직접 쓰고 연출한 작품으로, 앞의 작품들과 현실인식으로서의 주제의식 측면에서는 같은 맥락을 유지하고 있지만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차별성을 보인다. 앞의 작품들이 주제의식의 발언에 있어서 직접적 화법으로 명시적이라면 이 작품은 작품 속에 묵시적으로 은유의 기법으로 용해되어 있다. 그리고 대사의 표현에 있어서도 앞의 작품들이 조금 거칠고 직접적이라면 이 작품은 대사가 조금 정제되고 시적인 은유성을 지니고 있다.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앞의 작품들이 다소 도전적인 저항성이 강하다면 이 작품은 차분하고 부드러우면서 시적인 상징성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만큼 지난 역사를 보고 대하는 방식이 차분하고 냉철한 현실인식이 이성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작가의 작품을 빚는 방식이 완숙해지고 현실을 보는 시각이 여유로워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작품은 최근의 우리 현대사에서 정치적인 권력의 야욕으로 민중의 인권을 참혹하게 짓밟은 5 18 민주화 운동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그러한 살육의 현장에서 권력의 하수인으로 참여했던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또한 그러한 악몽의 기억이 한 인간의 영혼에 어떤 후유증을 남겼는가를 이 작품은 처절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이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스스로 유폐되어 있는 나의 정원은 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정화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 주인공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공간에 칩거하면서 악몽의 기억을 잊으려 하고, 또한 트라우마를 치유하려 하고, 심지어는 가족에게까지 그러한 트라우마를 전염시켜 가족을 궁지로 몰아넣기까지 한다.

 

엄마 : 그만, 그만! (소파에 앉으며) 나도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지...너무나 행복했으니까. (갑자기 웃으며). 그런데 어느 날은... 향수를 사가지곤... 몽땅 여기에다 뿌리질 않겠니...

: ?

엄마 : 자기의 냄새가 여길.. 꽃의 정원을 더럽힌다고... 그러면 꽃이 냄새를 내질 못한다고 말이야. 그리고 또 하루는.

 

천 뒤에 아빠 등장. 뭔가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 아빠, 파리채를 들고 땅을 기며...

 

아빠 : 이게 뭐야? (땅바닥을 치며) 벌레새끼들...감히 여기가 어디라고...더러운 갑옷을 입은 병사처럼...더러운 것들..이것들이 언제부터..여길 숨어 들어온 거야... 너희들은 나의 정원에 올 수 없어...(바닥을 헤매며 벌레를 찾는다)

엄마 : 그만하세요...내가 약을 뿌릴게요...내일요. 사람 사는 곳에 언제나 벌레는 있어요.

아빠 : (무섭게 변하며) 사람...사는...곳엔...벌레가...있다? 사람 사는 곳엔...말이야?... 사람의 악취가 벌레를 부른다?...사람의 악취가?...여긴 안 돼....여긴 나의 순결한 정원이야...내가 죽는 날까지 고귀하게 지켜야 해...나의 순결한 꽃을 위해 말이야...이것들을 용서하면...우린 다시 저 하수구 같은 세상에서만 살게 될 거야...안 돼 ...방심하거나 아량은 금물이야...그 사이로 우리를 상처 내어서...그 구멍 사이로 저들의 구데기를 뿌리고...결국에 그들의 악취로 우릴 굴복시킬 거야...안 돼! 죽어...죽어! (온 바닥을 치며 헤맨다)

 

엄마는 말려 보지만 몰입되어있는 아빠 모습에 공포감을 느끼고 도망가듯 퇴장. (암전)

 

 

 

 

 

 

위 인용문은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으로, 주인공인 아빠는 자신의 정원에 악취가 풍긴다며 향수를 뿌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냄새(악몽의 기억)가 정원을 더럽힌다고 자책과 자학을 일삼기도 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칩거하는 정원 바깥의 세상은 권력의 횡포로 오염되었으니, 자신을 비롯한 가족은 절대 자신의 정원에서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작품은 오욕의 역사 현장에 참여한 한 인간에게 가해진 트라우마가 얼마나 끈질기고, 그러한 상처를 치유하기가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를 섬찟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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