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장진 '아름다운사인'

clint 2018. 5. 20. 21:08

 

 

 

시체실에서 연극은 시작된다.
아니 시작부터 끝까지 시체실이 배경이다. 하지만 하나도 무서운 것은 없다. 죽은 사람 6명이 시체실을 지키는 사람과 나누는 자유로운 대화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무서울 것은 없다. 여기 나오는 죽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살한 사람들이다. 나는 왜 자살을 했는가에 대한 시체들의 넋두리를 시체실을 지키는 사람에게 푸념하는 방식으로 극이 진행된다. 그러다보니 현실 세계뿐 아니라 저승을 오가면서 진행되기도 한다. 농약을 먹고 자살한 사람. 옥상에서 투신한 사람. 승용차 타고 한강 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은 사람. 수명제로 자살한 사람.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 동맥을 절단하여 자살한 사람. 이렇게 6명이 나오는데 재밌는 건 모두 여자다. 물론 죽은 사람의 남편이 출연하기도 하지만 여자들의 연극이라는 점을 깨지는 못한다. 웃음 속에서 나오는 씁쓸한 현실세계의 고통을 잘 그려낸 장진의 작품. 죽은 사람들은 다양한 이력을 가졌지만 온전한 생을 마감하지 못했다. 남편의 바람 때문에, 소극적 성격때문에, 유부남과의 사랑 때문에, 아버지와의 불륜과 학업에 대한 부담 때문에, 암에 걸렸으나 치료비가 없어서, 비정상적인 직장생활의 괴로움 때문에 자살했다.

 

 

 

 


그런데 왜작품 제목이 아름다운 사인 일까.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아름다운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자살하지 않는 죽음? 정상적인 죽음? 그렇다. 연극은 정상적인 죽음을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인이라고 제목을 넣은 이유는 정상적으로 죽기 어려운 삶에 대한 역설이라고 볼 수 있다. 도덕적이지 못한 삶에 희생된 자살, 과중한 학업에 시달린 자살, 비윤리적 상황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자살. 병고에 시달린 자살. 이러한 죽음이 널린 시대와 그런 시대를 엮어가는 병든 정신에 대한 비판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공연 중간 중간에 보여지는 시체들간의 다툼, 과장된 어투와 서러운 감정의 포장과 복합된 감정의 좌충우돌 속에서 보는 이들은 웃음 머금게 된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편하고 가볍에 인식하도록 하는 극적 장치들인 것이다. 비판적 주제를 관객에게 쉽게 접근시키려는 희극성이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아름다운 사인은 다양한 죽음을 통해 동시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정신을 희화화를 통해 비판하고 되짚어 보는 내용을 죽은 이들을 위무하는 굿형식에 빌어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의 변
죽은 자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죽은 이유, 죽기 전의 상황, 죽은 후 그들의 심정을 추측하는 일 모두--- 왜냐면 나는 지금 겪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실존이란 명제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의 존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허나 그 실존이란 단어에 관심을 갖는 것은 죽음이란 예정형 명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어를 우리 주변의 누구들은 나보다 조금 먼저 겪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실존하고 싶어한다. 살아 있기를 증명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기 싫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우린 안다. 그토록 궁금한 살아있음의 확인은 우리가 죽었을 때 비로소 알게됨을--- 그렇기 때문에 우린 살아있는 것도 힘들고 그것의 증명을 위한 죽음 역시 힘든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 자살을 했단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린 바보라고 그를 욕하면서 그의 용기에 대해 스치듯 감탄한다. 자살은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며 잘잘못을 가르기 이전에 난 죽어도 할 수 없을 용기의 하나이기 때문에--- 여자 일곱 명이 자살을 했다. 그것은 그 일곱의 여자들이 자신들의 살아 있음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했고 그 결과 살아있기 싫다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죽은 사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살 동기에 대해 슬쩍 이야기하려 한다. 그녀들이 약을 먹었건 건물에서 뛰어 내렸건 그건 그다지 매력있는 수다꺼리가 아니다. 여자들이 세상 살기 싫다고 죽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세상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멀쩡한 여자들을 죽게 만든 세상은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며 만들어 놓은 세상이었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믿고 있던 당연함에 대해 그것이 그리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믿고 만든 규범과 구조들이 우리 옆에 있는 여자를 (솔직히 이건 굳이 여자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죽게 할 수도 있다라는 것. 우리가 생각한 옳음이 가끔은 옳지 않음으로 어느 순간엔가 우릴 엄습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여인에게 들려주는 죽은 일곱 여인의 사연과 수다. 여자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지 않으려는 이유에 대해 밤새 떠드는 이야기. '아름다운 사인'은 이런 수다와 조소, 농담과 푸념이 돌아다니는 그다지 순수하지 못한 희극이다. 페미니즘을 전두에 내세운 이야기도 여성의 권익 신장을 외치는 이야기도 아닌 그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다. 아울러 그 재미가 느껴지는 순간 우리가 갇혀 지내던 오랜 고지식함과 구조의 안주에 대해 어렴풋이 고민 하게될 연극이다. 나는 여자를 잘 모른다. 불행히도 여자는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나는 여자도 모르고 사람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잘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을 가끔 해봤는데 결국 난 아무것도 모른다. 여자들이 세상살기 싫다고 죽었다. 나도 언젠가 그런 결론을 내리면 어쩌지? 그땐 제발이지 이 무대 위의 여자들처럼 즐겁게 살던 세상 쉬이 한번보고 떠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