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윤택 '문제적 인간연산'

clint 2018. 5. 20. 21:00

 

 

 

북한에서 발행한 ‘리조실록’을 보며 구상되었다는 이 작품은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연산’이라는 인물을 개혁 지향적인 정치인으로 재해석함과 동시에, 통시적인 관점에서 지식인들의 기회주의를 질타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분명한 청산과 씻김이 없이는 제대로 된 미래가 펼쳐지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문제적 인간 연산>은 역사극이지만 과거가 아닌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 사회 개혁과 그에 따르는 좌절, 그리고 끝내 죽음으로 좌초하는 연산의 비극적 삶이, ‘개혁’이 자주 화두로 떠오르는 오늘날에 어떤 역사적 교훈을 줄 수 있는가 생각해 보는 것도 큰 의의가 있다.

 

 

 

 

줄거리
몇 백년이 지난 폐허가 된 궁 내부. 제주가 무덤 속 주인공을 부르는 묘제 의식이 거행된다.
“융아-”
혼령의 구음이 주문처럼 깔리고..
어머니의 환상에 시달리며, 연산은 악몽 중에 침상에서 굴러 떨어진다.
괴로워하는 연산을 보듬고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녹수!!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은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연신 공자와 유학의 도를 내세우며 어린 임금을 압제하려는 대신들과
여전히 대발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는 인수대비에게 눌려지내고 있다.
사대부들의 횡포에 음식조차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연산!!
이런 그가 마음둘 곳은 어린 임금을 어르고 달래는 녹수의 치마폭과
그를 보좌하는 내시 처선, 숭재, 자원뿐이다.
매일 밤 연산은 죽은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악몽을 꾼다.
이를 지켜본 처선, 숭재, 자원은 폐비 윤씨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제를 올리고,
대신들에게 들켜 혼이 난다.
연산은 조회를 열어 어머니 윤씨의 제를 올리고자 하지만,
공자 운운하는 대신들의 반대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이에 연산은 “나는 공자의 제자가 아닌, 조선의 왕이다”라고 일갈하며,
내시들과 더불어 직접 자신이 무당이 되어 굿을 한다.
그 과정에서 녹수에게 폐비 윤씨의 넋이 붙어 과거지사를 어린 임금이 알게되고,
연산은 윤씨와 자신을 해하려고 했던 귀인들과 인수대비를 살해한다.
녹수는 이후에도 계속 폐비 윤씨의 꿈을 꾸고,
폐비 윤씨의 혼령은 녹수의 몸을 통해 피적삼과 자신의 죽음을 연산에게 알린다.
결국 연산은 어머니가 사약을 마시고 죽은 사실을 알게 되고,
그와 연루된 대신들을 궁내에서 참혹하게 죽인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와 타락한 세상에 불을 지르려는 연산의 의지 아래,
궁궐은 죽은 중신들의 혼령으로 들끓고,
남은 연산과 숭재, 녹수는 점점 미쳐만 가는데…

 

 

 

 

 

작가 이윤택의 변
1. 첫 역사극을 썼다.
2. 나에게 있어서 역사극은 역사적 사실과 고정관념 속에 묻혀있는 문제적 인간을 발굴하는 일이다. 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인간적 진실은 동시대의 역사현실로 해석되고 수용되는 포괄적 상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3. 연산을 문제적 인간으로 해석한다. 한 시대의 기존 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해 버린 독재자. 그는 왜 절망적인 파괴의 드라마를 연출했는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는 절망의 구조가 오히려 정직한 답변이다.
4. 연산은 과거를 극복하는데 실패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인물이다. 과거에 대한 분명한 청산과 씻김이 이루어 지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미래는 펼쳐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은 490년 전 이야기이자 아직 청산되지 않은 지난 시절의 문제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시대가 풀어 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모성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띄우는 가정통신문 역할을 하는 교훈적 의미를 지녔으면 한다. 연산의 대여성관 또한 이러한 모성을 상실당한 애정결핍과 관련된다. 천한 신분출신 장록수가 연산의 총애를 받고, 전권을 행사하는 입장에까지 오른 것은 연산의 모성결핍에서 비롯된 마더 콤플렉스이다. 장록수는 연산과 운명적으로 해후한 모성, 그래서 연산은 장록수와 불꽃 튀는 애정/사랑과 증오의 관계를 맺는다. 이 사랑과 증오 속에 도사린 그리움과 인간적 진실이 이 작품의 숨은 감동이다. 정치나 삶 자체를 덧없이 한탕 유희로 생각하는 쾌락주의자 임숭재의 주관주의는 연산을 탕아로 몰아넣는 악역을 담당한다. 내시 김치선은 연산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소신있게 바른말하는 객관적 진실을 지니고 있다. 결국, 연산을 혼령으로 인도하는 것은 충복 김치선의 팔, 다리, 모가지가 떨어져 나간 혼령이다. 이런 기막힌 신뢰와 증오의 관계가 지식사회의 허위 의식을 벗기는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희한하게도 이윤택은 군부독재가 사라졌다는 이 90년대에,<불의 가면><허재비놀이><우리 시대의 리어왕><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그리고 이 작품에 이르기까지 혐오, 그리움, 찬탄, 냉소, 연민이 뒤섞인 태도로, 유독 독재권력과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만을 계속하고 있다. 정치권력이란 그의 중심적인 테마이며, 우스꽝스러움과 광기와 비장함을 동시에 지닌 독재권력이야말로 권력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확실히, 스케일로 보나 자신의 근작들의 내용·발상과<햄릿><로믈루스 대제>를 비롯한 외국 유명작품의 발상들을 이리저리 흡수한 것으로 보나, 역작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렇게 너무도 힘을 준 탓인지, 극작에서나 연출에서나 지나치게 수다스럽고 여러 욕심이 과잉이어서, 오히려 그다운 ‘쌈빡한’ 맛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유인촌과 이혜영 스타의 연극연기가 이만하면 얼마나 보기 즐거운가. (한겨레 신문 1995년 6월 24일, 이영미)


연산군을 다룬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연극에서는 자유인의 혼을 지닌 연산, 인간다운 정감을 지닌 연산, 그리고 낡은 인습에 도전하는 연산으로서의 새로운 성격을 구축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군데군데 노정되고 있는 점에서 하나의 실험적 작업임이 분명하다. 무대 위에는 과거에 죽은 자들을 무덤에서, 대숲에서, 연못에서, 혹은 천장, 혹은 침상에서 모두 불러내어 살리고 그들로 하여금 지난 시대의 역사를 투시적으로 재현시키면서 동시에 불행하게 희생된 그들의 넋을 달래주려는 표현주의적인 초혼굿을 펼쳐 보인다. (조선일보 1995년 6월 24일, 서연호)

 

 

 


<문제적 인간, 연산>의 ‘연극성’은 참으로 다양하다. 퍼포먼스를 강조하고 사건의 진행을 신속하게 하여 인간 행동의 모방이라는 고전적인 개념의 ‘연극성’은 물론 연극 자체의 ‘연극임’을 반영하는 현대적 ‘연극성’에 이르기까지 다중다양한 ‘연극성’이 극의 양식과 형식, 주제와 구조, 글쓰기와 무대만들기 등 모든 마당에서 예술적 필요에 따라 때로는 논리적으로, 때로는 초논리적으로 실현돼 있다. 이 다양하고 정당한 그리고 적절한 ‘연극성’이야말로 이 연극이 한국연극의 발전을 위해 이룩한 이정표적 업적임에 틀림없다. (<한국연극>1995년 8월호, 김윤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