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clint 2018. 5. 19. 07:25

초연본 : 원작에 충실하며 많은 장면 전환의 문제를 단순화 형상화 하여 구성하엿다

이상우 외 각색본 : 버라이어티하게 뮤지컬식과 많은 등장인물, 단역들, 군중들 까지

구성하였으나 너무 방대한 감이 있다

 

 

 

줄거리
가장 낮은 곳에서 울리는 가장 따뜻한 이야기. 우리시대가 만든 소외된 신화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키117cm, 몸무게 32kg. 이것이 난장이 김불이의 체격이다.

그는 다섯 식구의 가장이다. 늙고 쇠약해진 그는 늘 달나라를 풍경한다.

우주의 첫 관문인 달에 천문대가 서면 그 곳의 일을 보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기때문이다.

아내와 자식들은 난장이의 그러한 꿈을 부정하지만 그는 오늘도 달을 향해 쇠 공을 쏘아 올린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벽돌공장 굴뚝 위에서 난장이는 기어이 우주선을 타고 달에 착륙해 버린다. 가족들을 지상에 남겨둔 채…

난장이 대신 가장이 된 큰 아들 영수는 아버지가 왜 달나라에 갔는지를 점점 깨닫게 되고, 그도 역시 달나라로 가는 우주선의 차표를 끊는다. 한 마리의 작은 도도새가 되어…

 

 

 

 

 

이 작품은 한마디로 1970년대를 처절하게 밑바닥 인생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한 난쟁이 가족의 수난사이다.

난쟁이 김불이 가족들은 지옥과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한다. 난쟁이 자신은 채권 매입, 칼 갈기, 고층건물 유리닦기, 펌프 설치, 수도 고치는 일 등을 했고, 자식들도 모두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나간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결국 산업화라는 거대한 힘과 가진 자들의 무관심 속에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그들은 결국 ‘낙원구 행복동’에서 내몰린다. 고난과 멸시를 견디지 못한 난쟁이는 근대화에 밀려 집이 철거되자 높다란 굴뚝에 올라가 차별없는 별세계를 꿈꾸며 자살하고 만다. 죽어서야 낙원구 행복동에 간 셈이다. 1970년대의 ‘난장이’는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남들처럼 존엄한 인간이 아니요, 고귀한 사람들을 위해 밑바닥에서 사회를 떠받쳐야 한다. 가진 자가 하라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먹으면 된다. 이처럼<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선이 확실한 대립, 갈등이 설정되어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용자와 근로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가 뚜렷이 나뉘어 있다. 대학생 지섭, 가정주부 신애조차도 난쟁이편에 가담하여 중간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갈등의 양측이 화해하려고 하는 것은 적어도 1970년대에는 하나의 상상이거나 환각이었던 셈이다.     

 

‘낙원구 행복동’을 꿈꾸며 죽은 난쟁이가 이 땅이 살 만하다고 지금쯤은 과연 되돌아오고 싶어할까? 상황이 그때와는 다르겠지만, ‘난장이 세계’는 우리 주위에 여전히 남아있다. 부정, 비리, 폭력 기사투성이의 신문, 하루 술값으로 서민들의 한 달 월급을 뿌리는 사람들, 생산 원가를 건지지 못해 논밭을 갈어엎는 농민, 야근을 하더라도 빠듯한 노동자의 살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바로 그런 곳을 잊지 말라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난장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둠침침하고 절망스런 분위기가 감도는 무거운 작품들, 대체로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거나 역경을 만나 몰락해 간 어느 집안이나 그런 사회의 모습을 암담하게 펼쳐내기만 하면 거기에 리얼리즘이 깃든다고 생각하는 연극인들이 꽤 많다. 필자는 그런 투의 사실주의 작품을 ‘한국적 리얼리즘’이라 이름 붙이고 그런 리얼리즘은 잘못된 현실의 반영으로 제쳐놓는다.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연극에서도 자주 되씹곤 하지만 그 리얼리즘이 문예사조에서 말하는 19세기 말엽의 ‘사실주의’는 분명히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주의를 떠들자는 것도 아니고 보면 연극에서 말하는 리얼리즘은 마침내 현실을 사실적으로 나타낸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게 된다. 그런데 리얼리즘이란 표현을 쓰면서 봉건시대 또는 식민지시대의 참담한 비극을 즐겨 다루는 연극인들은 인식의 과오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무턱대고 무대가 어둡고 무겁고 지루해지면서 등장인물이 모두 죽어 나가거나 미쳐 버리는 연극이 잘된 리얼리즘 연극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런 발상법은 신파 연극의 멜로드라마가 비극미를 보태기 위해서 과장했던 절망, 좌절, 불행, 죽음 따위에 현혹되었던 의식의 연장에 리얼리즘이라는 패배주의를 얹어 두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그런 가짜 리얼리즘을 ‘한국적인 리얼리즘’이라 하여 욕설을 해대곤 한다. 그런데 조세희(趙世熙)의 소설을 무대에 올린<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보면서 이런 작품이야말로 ‘현실’을 이야기해 주는, 그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사회를 엇비슷하게 그려내는 리얼리즘 연극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이제야 새로운 한국의 리얼리즘 연극이 막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하여 작은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무대는 거의 사실성이 없었다. 그리고 무대에는 현실적인 갈등도 드러나지 않았다. 난쟁이가 등장했지만 그에게만 조명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상징일 뿐이고 그의 가족,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 형제의 거동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사건이 두드러지게 사실적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었다. 난쟁이 아비가 가장인 어느 가족의 뼈아픈 삶 –집이 헐리고, 그 헐린 집 대신에 얻은 입주권을 파는 가난한 사람들 –이 그려진다. 난쟁이는 어차피 사회에 피해를 입힐 수 없게 태어난 불구자다. 그들의 주변 환경에 오염의 구정물을 한 방울도 흘려 보낼 수 없을 만큼 선량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각박한 사회에서 기형아가 되어 버리는 가난하고 무력한 밑바닥 인생이 그들이다. 난쟁이는 열심히 살았고, 성실히 살았고, 지치게 살았다. 굴뚝에서 떨어져 죽은 그의 삶은 착한 작은 세계의 종말을 뜻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았고 오직 작은 세계의 평화를 지키며 산 난쟁이의 세대가 간 뒤에 온 난쟁이 아들의 시대는 저항의 시대, 살인의 시대, 죽음의 시대가 된다. 행복동의 방축 시대는 난쟁이의 선한 시대였으나 은강의 공장으로 옮겨 앉은 아들의 시대는 폭력의 시대다. 구원은 아무 데도 없다, 난쟁이의 시대에 사람들은 난쟁이의 불구를 탓하고 놀리고 혹사시킬 것이 아니라 그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팬지꽃이 피는 작은 집에서 달을 보면서 구원의 우주인을 기다리던 그들의 작은 소망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휴머니스트의 눈이 없었던 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난쟁이 시대는 가고 살벌한 거인의 시대가 온다. 기계와 공장의 소음, 노무자와 기업 경영자 사이의 갈등과 압력, 달의 서정이 가셔 버린 인공위성의 과학문명시대는 오히려 난쟁이의 불구가 더 인간답다는 역설을 배고 있다. 그러나<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강렬한 현실의 이야기면서도 연극방법의 환상성 때문에 우리는 이 공연 작품이 조세희의 소설이 아니라 이언호(李彦鎬)가 각색한 작품이며 채윤일(蔡允一)이 연출한 작품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언호는 각색과정에서 흐름이 담담한 원작의 서사적인 표현을 시적인 리얼리즘으로 몰아갔고, 채윤일은 그 시적인 리얼리즘을 —어쩌면 현실이라는 바닥을 너무 믿은 탓이겠으나—무대 현실에서 철저히 혼란을 일으키는 주관적인 연출로 일관해 버린 것 같았다. 주제가 지극히 사실성이 강하니까 무대는 시화(詩化)되어도 좋다거나 어지간히 혼란스러워도 좋다는 발상이 새로운 리얼리즘 연극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발상을 높이 산다 하더라도 그 ‘새로운 리얼리즘’에 몇 가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소설<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열 개가 넘는 연작 단편들이다. 그것을 주제에 따라 무대에 형상화시킨 이번 경우는 정석의 극작술대로 다듬을 수 없음은 상식이겠고, 그래서 이언호의 환상적인 무대 구성은 그 구실이 선다. 그러나 시적이고 환상적인 무대는 그 만큼 감정과 주관이 앞서기 쉬워서 질서 있는 전개가 없으면 오히려 비현실감을 낳게 됨을 이언호는 먼저 생각했어야 옳았다. 그와 함께 강력한 현실 이야기가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떨어져 나갈 위험을 동반한 데에는 전혀 기능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무대장치의 무성의함과 기능적으로 잘 작용한 조명의 치밀한 참여도 들어야 할 것이다. 무대는 몇 조각의 나무토막으로 삼등분된 채로 통합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는데 특히 중요한 굴뚝 구실을 하는 중앙의 입체물은 양면의 구성에 견주어 지나치게 구성이 촘촘했다. 김의중이 맡은 조명은 이 시적인 리얼리즘의 연극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동수가 역을 맡은 난쟁이를 부각시키는 데에는 조명이 거의 힘을 쓰지 않았음이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실루엣의 형성이나 분위기의 반응에는 매우 미묘하게 작용했고, 그것이 또 빈틈없이 들어맞았던 점에서 성의 있게 연극 제작에 참여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연극은 후반으로 갈수록 치열해진다. 앞부분의 주관적인 압축에서 빚어진 비현실감이 은강 공장의 노무자들끼리 벌이는 ‘극 속의 극’의 장면 뒤부터 바뀌어,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다 들려주는데 이 잔인한 현실의 이야기가 연기자들의 역할 전환에 따른 성격창조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관객들의 의식에 심한 혼란을 주었다. 난쟁이가 은강그룹 회장으로 분장하거나 난쟁이 집안의 동생이 은강 회장의 차남으로 탈바꿈하는 것 같은, 한 사람이 2역 또는 3역으로 변신하는 기술을 부릴 때에 재빠르게 의식을 전환시키지 못하는 관객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역할 전환이 연출자나 연기자한테는 이미 정해진 사실일지라도 관객의 처지에서는 변신의 계기가 주어지지 않은 채로 다른 역할을 맡고 나온 연기자가 앞장에 했던 것과 똑같은 동작을 보이면서 다른 역할, 다른 성격의 인물로 여겨 달라는 어려운 주문에는 따라갈 수 없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극작이나 각색에서 그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옳다. 그 좋은 본보기는 은강 회장의 차남이 재판장으로 탈바꿈하는 경우이다.
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감동의 리얼리즘을 위해서 현실이란 것이 얼마만큼 반영되고 어떤 형식으로 묘사되어야겠느냐는 것인데, 이언호의 각색처럼 시적이고 환상적인 리얼리즘도 한 방법이 되겠고, 채윤일의 연출처럼 치열하고 생경한 몸짓이나 발언도 한 방법일 수는 있다. 그러나 약한 자를 묘사하는 것이 강한 자를 비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옹졸한 사회 풍토 속에서 리얼리즘이 마침내 한국적인 리얼리즘이나 ‘환상적인 리얼리즘’으로 도망갈 구실을 찾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환상적인 리얼리즘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환상의 합리적인 전개보다 주관적인 판단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에 그 현실묘사의 감동과 고발정신이 막다른 길로 처리되기 쉽다. 그런 흠이 담담한 서사문학을 무대에 올릴 경우에 더 심해지는 것을 우리는 이번 연극에서도 보게 된다. 이 공연 작품의 첫머리에 나오는 약장수 집단의 해체와 앉은뱅이 꼽추의 넋두리 따위도 그들이 약자의 무리요, 밑바닥 인생이라는 사실은 빼놓으면 난쟁이의 주제를 펼치는 데에 오히려 의식의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그런 혼란은 이 작품을 환상적인 리얼리즘을 끌어가는 과정에서 너무 자주 드러남으로써 현실 반응의 사실성을 감소시켰다. 그만큼 환상, 곧 비현실성의 강조는 직설적인 리얼리즘에 의식의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나쁘게 말하자면 원작 소설에서 독립하여 그것을 각색하고 연출하는 과정에서 각색자나 연출자의 주관적인 아집 같은 것을 지나치게 드러냄으로써 마침내 ‘혼란의 리얼리즘’이 생겼다. 연출자나 각색자에게는 주제가 선명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분명하다 해도 무대에서 그것이 어떻게 형상화되느냐가 객관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런 뜻에서 이번 작품은 구성이 일방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 간신히 찾고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뒤뚱 걸음이 이 공연 작품을 계기로 좀더 분명한 걸음걸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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