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대성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

clint 2015. 11. 4. 18:28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 (2011. 9)는 여학생 때 '양띠 3인방'(현재 67세)으로 단짝이었던 여인들의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치매 남편의 간병을 하고 있는 옥란, 연하의 시인 한식과 연정을 불태우는 재분, 그리고 10년 전에 남편을 잃고 외롭게 지내고 있는 혜숙이 그들이다. 오랜 결혼 생활을 통해서 이들이 발견한 것은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개성과 인격을 해주는 헌신적인 사랑의 소중한 가치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들이 되돌아 본 지난날의 부부생활은 한 마디로 ‘결손 부부'이고 '남편의 성적 만족을 위한 대리 역할'이었다. 옥란은 평생 완고한 남편의 뒷바라지 하다가 지금은 간병인으로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녀는 '도대체 내 인생은 뭐야?'라고 자탄한다. 과수원을 하던 재분의 남편은 아내가 연하의 남자(한식)와 정분이 나자 농약을 마시고 자실했다. '남편 잡아먹은 화냥년에게 시랑은 정당한가?'라고 그녀는 자문한다. 자랑할 것이라곤 성실성 밖에 없다, 남편과 결혼한 혜숙이지만, 온당한 부부생활을 실현하지 못했던 그녀의 삶은 보람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자식들을 남기고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렇게 꿈이 많았던 소녀 3인방은 그 동안 결혼생활에 지쳤고 예상하지 못한 비극을 경험했으며, 이제 완숙한 노경에 들어서서 젊음의 꿈을 그리워하고 있다. 여학생 때 배운 노래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는 이들의 잃어버린 정서를 일깨운 청량제가 되고 있다. 늦었지만 다시 찾고 싶은 단 한 번의 진정한 인생을 갈구한다.

 

 

 

 

이 작품에서 한식의 시는 호소력이 있다. "여름날 뜨거운 청춘을 다한 나뭇잎이/
서서히 가을빛에 단풍들어/
고운 빛깔로 마지막을 장식하듯/
내 사랑도 아름답게 물들고 싶다”
이렇게 단풍이 든 나뭇잎을 완숙한 삶에 비유한 것이다.
비발디의 〈사계〉와 쇼팽의 〈야상곡〉은 이 여자들의 내면을 심장으로 느끼게 한다. 갈등하던 여자들은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는다. 옥란은 치매환자라도 남편이 생존해 있음을 감사하며 행복을 느낀다. 재분은 주위의 비난을 초월해 한식과 마지막 사랑을 불태우기로 작정한다. 혜숙은 마지막 가는 암환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일생의 갈등과 고통을 극복하고 아름답게 인생을 완성하려는 여자들의 모습이 간결하게 신선하게 표현된 한 편의 드라마이다.

 

 

 

갈수록 나이든 남자들이 힘들어지는 세상이다. 과거 여자들이 더 큰 고통을 감내하며 살았던 시절과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남자들이 처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여자들은 오랜 기간 남성지배의 사회에서 스스로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꿈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되찾으려 한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연극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는 그러한 사회상의 변화를 67세의 여고 동창생 세 명의 입을 통해 그려낸다. 노령화 시대에 노년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과 사랑의 감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극적인 사건이 있기 보다는 노년 여성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과 느낌을 잔잔하게 무대에서 펼쳐낸다.
무대는 강원도 해변 휴양지에 있는 별장 형 콘도의 로비다.
재분의 남편이 자살한 것을 계기로 서로 만나게 된 혜숙, 옥란 등 황혼기에 접어든 세 명의 동창생. 재분이 상을 치른 후 친구들을 콘도에 초청해 학창시절의 추억과 각자의 남편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 중 재분과 교통사고로 남편이 오래 전 사망한 혜숙이 죽은 남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대사에 나오는 '개뿔!'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혜숙의 남편은 최고의 대기업 임원으로 성실함이 이를 데 없고 오직 일과 직장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돈 쓸 줄도 몰라 봉급은 모두 집에 가져다주고, 바람도 피울 줄 몰랐던 위인. 혜숙은 그런 남편에 대해 거침없이 '유죄' 판결을 내린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남편이 아니냐"는 옥란의 말에 혜숙은 "누가 희생해 달래? 그저 같이 인생을 엔죠이 하면서 살자 그게 내 바람이었어!"라고 내뱉는다.
재분은 친구들에게 남편이 자살한 것은 자기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평생을 교육공무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하고 재분과 함께 시골 과수원을 운영해 왔다. 재분이 과수원에서 일하는 연하의 남자와 은밀히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고지식한 남편이 자존심이 상해 자살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옥란과 혜숙은 친구가 그 나이에 바람을 피우고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옥란은 남편이 파킨슨씨병으로 투병중이다. 연극의 첫 장면에 옥란이 시집간 딸과 통화하면서 "내 친구들 중에 남편이 살아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며 짜증스러워하는 장면을 통해 옥란은 지금의 처지를 커다란 구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옥란은 삶이 주는 압박감을 떨쳐내 버리고 싶으나 뾰족한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다. 남편이 없이 왠지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듯 보이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뿐이다.

 

 

 

사실 지난 수년간 노년의 삶을 다룬 연극은 꾸준히 만들어져 왔다. 가장 최근 작품으로는 지난달 대학로 무대 위에 올려졌었던 '나두야 간다'(천정완 작ㆍ신유청 연출)가 있다. 며느리와 딸의 집요한 돈 요구에 지친 칠순이 넘는 노인이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고려인 여성의 따뜻한 마음에 이끌려 그 여성과 함께 자신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지난해에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아온 노년 남성들의 삶을 조명한 실버연극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이 산울림소극장 무대 위에서 선보였었다. 이번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는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의 작가와 연출이 노년 여성들의 꿈과 사랑에 초점을 맞춰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이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황혼기에 접어든 여성들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혜숙은 6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독립적이다. 노인이라는 말도 듣기 싫어한다. 친구들을 향해 혜숙은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늙어 보여? 하긴 어쩌다 지하철을 타면 애들이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그런다. 그럴 땐 애들이 미워 죽겠어."
이들 친구간의 대화에 남녀관계나 성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도 지금까지의 실버연극과는 차이를 보인다. 재분은 전직 국어 교사이자 시인인 김한식과의 밀회에서 오는 환희를 친구들에게 전하면서 "나이는 섹스와 상관없어. 섹스는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거든" 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한다. 그 뒤는 "그런데 이 남자는 다른 거야. 더듬는 손길 하나, 입 맞추는 숨결조차도 부드러운 거야. 상대를 배려해주고 혹시 상처 날까봐 말도 조심하고... 그 희열! 전엔 상상도 못한 경험이었어!"라는 대사가 이어진다. 이 작품을 보면 이제 노년층의 남녀관계가 정신적인 것에 국한될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라는 느낌도 든다. 모두 칠순이 넘은 원로 작가와 연출이 만들어낸 작품이니 노년에 있을 수 있는 '불륜'이나 남편들에 대한 비난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재분의 경우 일찍 상처한 후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김한식에 대한 연민과 시나 음악을 매개로 한 낭만적인 사랑이 그려져 있다. 혜숙이 죽은 남편에게 내린 '유죄 선고'는 실제 그런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두고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넋두리 같이 들리기도 한다. 옥란은 결국 투병 중에도 아내에게만 자신의 몸을 만지게 하는 남편에 대한 지극정성의 보살핌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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