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신봉승 '이동인의 나라'

clint 2015. 11. 2. 18:43

 

 

 

 

 

척화와 개화의 대립을 선악의 문제로 살펴 단죄할 수는 없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후기 사상사가 그 부딪힘 아래로 녹아 흐르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북벌과 소중화의 사유는 300년 가까이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있었고,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한 실학파의 고민과 슬픔은 남도의 아름다운 해안과 섬을 맴돌았다. 주변에 머무르던 개화파가 단숨에 중심으로 치고 올라왔던 갑신정변은 조선후기 사상사의 구도를 뒤엎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열혈청년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혁명의 기운을 불어넣은 장본인, 그가 바로 개화 승 이동인이다. 외세의 침략을 경계하면서도 외세를 통해 국력을 키워야만 했던 개화파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작가는 이동인의 삶을 통해 개화기 지식인이 기획하였던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의미를 되새긴다. 머리말에서 밝힌 명치유신과의 횡적 비교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19세기 말의 지식인들이 낡은 국가를 버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작품은 크게 두 축으로 진행된다. 먼저 외세로부터의 상처와 외세에 대한 관심에 초점을 맞추어 이동인의 삶을 훑어 내린다. 이동인이 휘날린 '개화'의 깃발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추종의 결과가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작가는 이동인의 고통에 찬 얼굴과 복잡한 내면을 성장 소설적 기법으로 치열하게 더듬는다. 또한 작가는 이동인이 살았던 시대의 큰 흐름을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개괄한다. 이 역사적 사건들을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동인의 외교활동이 정치권력의 중심, 즉 당시 권력을 장악한 민씨 일파와 왕실의 후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당대의 정치권력을 일람하는 것은 곧 이동인의 한계를 가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근경과 원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이동인의 감동과 이를 조선으로 옮기려는 애국적 열정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일본과의 담합을 감추려는 고도의 술책인가 아니면 외세로부터 조국을 지키려는 고뇌에 찬 결단인가. 추종자가 늘수록 의심의 칼날도 번뜩이기 마련이다. 이동인의 실종을 척화파에 의한 납치 및 암살로 처리한 노대가의 추측 역시 이 대목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개화파들의 새로운 나라는 이동인의 실종,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끝내 세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짧은 생애의 행간에서 죽음 너머로 펼쳐진 희망의 아우라를 감지한다. 그것이 실패한 사상가들의 어지러운 삶을 작은 이야기로나마 정리하여 살피는 이유일 것이다.

 

 

 

 

이동인
이동인은 1849년 조선 경상도 양산군(지금의 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가계나 출신 성분,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 부산 범어사에 승려로 있었으며, 양산 통도사에 있었다는 말도 있다. 그 뒤 1860년대부터 한성부 봉원사에서 활동하였다. '일본통'으로 알려진 인물로, 처음에는 유대치와 교류하다가 1870년경 유대치의 소개로 그의 문하에 출입하던 김옥균 등을 만나게 되었다. 한자와 일어에 능했던 이동인은 일본 혼간사(本願寺)의 부산 별원을 왕래하면서 일본의 승려들로부터 입수한 만국사기(萬國事記)와 세계 각국의 풍물 사진을 청년 관리들에게 전해 주었다.
1879년 3월에 이동인은 일본 불교 오타니 파 혼간사의 부산별원에 드나들면서 서구 여러 나라에 관한 사진과 〈만국사기〉, 성냥 등을 얻어서는 서울 봉원사에서 김옥균, 서재필, 유대치, 오경석 등에게 개화 문물을 보여줌으로써 개화파와 교류를 하였던 것이다.[3]
1870년대 초에도 청나라를 다녀온 뒤 서구 문물의 놀라움을 말하던 박규수나 오경석 등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자, 이들과 일찍부터 친하게 지내던 이동인은 부산과 일본을 오가거나 개성의 송상을 통해 들여온 괘종시계, 태엽 기계와 시계 등을 보여주어 박규수, 오경석의 주장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음을 입증해주었다. 이동인이 혼간사 부산별원에 드나들었다는 것은 오쿠무라의 〈조선국포교일지〉에 의하여 1878년 6월 2일부터 2회, 12월 9일부터 4회에 걸쳐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1879년 3월부터 오쿠무라의 포교소(부산 별원)에 드나들면서 일본 밀항을 준비한다. 1879년 6월 일본의 국정을 살피고 세계 정세를 파악할 목적으로 유대치 등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어를 배웠다. 1880년 5월 이래로 주일 영국 공사관의 서기관 사토우(Ernest M. Satow)와 빈번히 접촉하여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며 그와 정치 문제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개화승으로 행세하면서 조선과 일본을 건너다니며 다수의 유학생을 일본으로 보내어 친일파로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동인은 일본에 가보길 원했으나 승려였고, 이러한 사정을 딱하게 여긴 김옥균은 그의 일본행을 적극 주선, 건의하여 1876년(고종 16년) 조선정부의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보내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오게 했다.
이동인은 양산 통도사의 승려인데 오쿠무라와의 접촉으로 개화 문물을 손에 넣은 다음에는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서 김옥균,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들과 교류하면서 김옥균이 여비로 준 금덩이 네 개를 오쿠무라에게 내보이면서 일본 도항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동인의 금을 받지 않고 여비나 생활비로 쓰라 하며 오히려 추가 여비와 각 지방 별로 무사집단이 난립하는 혼란상임을 주지시키고 조심할 것을 충고했다. 이리하여 이동인은 오쿠무라와 마에다(前田獻吉) 영사의 주선으로 교토에 가서 그곳 혼간 사 본산에 머물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1879년 4월 이동인은 득도식을 하고 일본 진종(眞宗)의 승려가 되었고, 도쿄 아사쿠사 별원(草別院)에 기숙하면서 주지 스즈키(鈴木惠順)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일본 외무성의 요인들을 비롯한 여러 일본 명사들과 접촉하였다. 또한 그는 이때 수시사로 도일한 김홍집을 만나서 친교를 쌓았다. 이동인은 동경에서 데라다(寺田福壽)의 소개를 받아 당시 일본의 외교가로 명망을 떨치던 후쿠자와 유키치와 교류하기도 하고[6], 일본 각지를 다니면서 미국과 프랑스, 영국 선함과 백인들을 만나보기도 했다. 이동인은 이들의 행동, 신체 구조 이들이 먹는 특이한 고기 등에 대해서 편지로 적어 유대치와 김옥균 등에게 보냈다.
일본·중국의 유지들과 간친회로서 아시아 및 세계정세를 분석하고 구미제국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활동하던 흥아회(興亞會)에 출석하는 등 일본 조야의 정계,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유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많은 서적과 자료 등을 오쿠무라에게 부탁하여 김옥균 등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동인은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1880년 6월에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金弘集)과 만났는데, 이동인의 식견에 감동한 김홍집의 추천으로 조선조정에도 연이 닿게 되었다. 1880년 8월에 이동인은 제2차 수신사로 와서 아사쿠사 관음사에 유숙하던 김홍집과 만나면서 조선 정계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6] 김홍집과의 면담 이후 급격히 그와 가까워진 이동인은 수신사 일행이 1880년 9월 16일 일본을 떠나 귀국하자 이들 일행과 함께 귀국, 9월 28일 귀경하였다. 그해 9월 귀국하면서 가져온 램프·석유·잡화 등의 일본 제품을 왕실·세도가와 친지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때 처음으로 일본 제품이 서울에 들어왔다. 서울에서는 일본 공사관에 드나들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막후 참모 역할을 하였다. 1880년 10월에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서 아사노 도진 (淺野東仁)으로 개명하면서 일본 외무성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귀국 직후 이동인은 김옥균 등에게 서적 및 기타 자료를 건네주었다. 이동인이 귀국할 때 혼간 사에서는 이동인에게 쌀 2백 가마 값에 해당하는 일본화 1천 엔을 주었다.[6] 이와는 별도로 포교 비용은 나중에 부쳐 주었다. 일화 1천 엔으로 이동인은 램프, 석유, 잡화 등을 들여와서 왕실, 세도가와 친지들에게 선물했는데, 이것이 조선인에 의해 외제 상품이 서울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최초였다.
김홍집은 귀국 직후 민영익에게 이동인을 소개하였다. 민영익은 이동인을 만나보고 그의 식견의 탁월함에 경탄하여 자기의 사랑방인 연당(蓮堂)에 거처를 정해 주고 여러 차례 국왕에게 알현토록 주선하였다. 이동인은 일본 국정의 견문, 분석은 물론 세계의 정세와 이에 대처할 조선왕조의 방책을 상주하여 고종을 감복시킨 데다가 김옥균 등의 강력한 조언에 힘입어 크게 중용되기에 이르렀다.[8] 뿐만 아니라 그는 국왕의 밀사로서 1880년 10월에 재차 도일하였다. 이동인은 제2차 일본행은 조미수호통상교섭의 알선을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장)에게 의뢰하는 고종의 밀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11월 19일 하여장 청국공사를 찾아가 고종의 밀명을 이행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대원군과 그 당료들이 고종의 개방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고종의 밀명으로 일본에 밀파된 이동인이 귀국하면 제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정보를 접한 유대치가 급거 부산으로 달려갔다.[8] 귀국한 이동인은 동래부에 체포 구금되었다. 그러나 유대치의 주선으로 7일 만에 석방되어 1881년 1월 초순에 상경하였다.
서울 도착 즉시 이동인은 국왕으로부터 별선군관에 임명되어 자유로이 왕궁을 출입, 고종과 대담하고 진언하기에 이르렀다.[2]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서 이동인은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보낼 때에도 막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포 등의 무기와 군함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과 비밀 교섭도 벌였다.
김옥균은 곧 자신도 일본에 가고자 했고, 이동인이 입수해온 서적과 물건들을 선물로 받았다. 김옥균은 1881년경 일본에 갈 것을 결심하고 고종에게 여러 번 건의하여 설득한다. 이때 이동인 역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이원회와 함께 일본과의 군함 구매 비밀 교섭을 하다가 실패한 뒤 행방을 감추었다.
1881년 5월 서울에서 암살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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