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박우배는 배역 자체에 너무 몰입하지 말 것을 강요하는 연출가와 맡은 인물에 완전히 몰입할 것을 훈련시키는 두 연출가 사이에서 고뇌한다. 사소한 싸움으로 감옥까지 간 우배 씨가 그곳에서 특수절도범 제갈조를 만나면서 자신을 회복하게 되는 이야기. 이 극에는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나온다. 혼란스런 박우배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남장여인술집 가수와 오직 사람들의 과거에 관한 자료만을 훔쳐 수집하는 제갈조. 박우배는 특수사기전과가 있는 제갈조와 같이 오래전 행방불명된 재벌 외아들 송준오 역을 맡아 결국 완벽하게 수행하여 그가 송준오라고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재벌의 아들로 부를 물려받을 즈음 다 물리치고 다시 배우로 돌아온다. 어느 날 “나는 과연 누구일까”라는 극심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상실감에 빠져 판에 박힌 배우생활에서 뛰쳐나와 ‘영원한 원형인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아프게 꼬집는다.
배우우배에서 나오는 전혀 다른 두 유형의 연출가가 있다. 한명을 우배에게 예명을 지어준 연출가. 다른 한명은 제갈조이다. 제갈조는 우배에게 송준오라는 인물에 완전히 몰입하라고 한다. 그래야 맡은 인물은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반면에 다른 연출가는 배우가 맡은 인물에 너무 몰입하면 안 된다고 한다. 너무 몰입하면 그 인물도, 배우도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스타니스라프스키의 '배우수업'이라는 책에서도 그는 말했다. 연기란 맡은 인물을 최대한 비슷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연기가 아니라 그 인물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여장남자가수가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단지 해학적 요소를 집어넣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도 상징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정체성의 혼란. 그는 성 정체성의 혼란을 나타내는 인물이지만 모두에게 있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상징하는 인물인 것이다. 극중 배우 우배는 작품을 한 후에 자신이 맡은 역을 끝내고 오는 허탈함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이것은 일상 사람들의 속에서도 들어난다. 실직, 정년퇴직 등 자신의 배역에서 나오게 되면서 세상 밖으로 밀려난 듯 우배 같은 허탈함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배우 우배에서는 배역은 끝난 후에도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배역을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배역으로 인해 얻어진 지혜나 노하우등 영원히 변치 않을 것들은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배우 우배'는 2003년 10월 2일부터 11월 9일까지 강강술래 극장에서 공연하였다. 극단은 김갑수 씨가 대표로 있는 〈배우 세상〉, 연출은 최용훈 씨가 맡았다. 김갑수 씨는 〈연극 세상〉이라는 극단 이름을 〈배우 세상〉으로 고쳤다. 배우가 연극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극단 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배우 세상〉보다는 그 전의 〈연극 세상〉이 뭔가 포괄적이랄까, 포용력이 있어서 더 좋게 느껴진다. 어쨌든 김갑수 씨와 나는 '물고기남자' 공연을 통해서 서로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고, 다시 한 번 빠른 시일 내에 또 다른 작품을 공연 하자고 다짐했었다. 그후 김갑수 씨는 새 작품이 언제 나오느냐며 여러 차례 독촉하였는데, 극단 이름을 〈배우세상〉으로 고쳤으니 아예 배우에 대한 작품을 써달라고 했다.

작가의 글
나는 오래전부터 배우에 관한 희곡을 쓰고 싶었다. 극작가는 배우에게 진 빚이 많다. 배우가 아니면 극작가의 작품은 종이에 적힌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글자에 배우가 몸을 입히고, 혼을 불어넣고, 목소리를 냄으로써 비로소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배우가 등장인물을 형상화하는 것에 감탄하였고, 공연이 끝난 다음 흔적도 없이 그 인물들이 사라질 때 겪는 심리상태가 궁금했다.
몇해전 작고하신 배우 이진수씨는, 텔레비전드라마에서 박정희 대통령 역을 맡아 목소리, 얼굴 표정, 걸음걸이 등 너무나 흡사하게 재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진수 씨에게서 직접 들었는데, 그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자기 자신이 실제 박정희 대통령으로 느껴져서 당혹스럽다는 것이었다. 배우로서 오랜 경험을 가진 분이 그런 고백을 할 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배우란 자기 자신과 등장인물의 격렬한 싸움을 겪는 이중적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배우 우배」에서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연극평론가 이영미 씨가 이미 오래전에 내 작품들에 대해서 지적하였듯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탐구' 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햄릿」이라든가 「따르뛰프」,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를 예로 들면서,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는 그러한 존재들이 알고 보면 영원한 원형으로 현존한다. 배우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등장인물의 소멸이라 는 상실감을 극복하게 된다.

'배우 우배' 공연에서도 숨은 이야기 하나를 밝힌다. 강강술래 극장에서 연극 공연을 여러 번 보았던 나는, 그 기다란 무대가 너무 좋아서 '배우 우배'를 반드시 그 극장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김갑수 씨는 내 주장을 받아들여 강강술래 극장을 대관했는데, 공연할 때 가서 보니 놀랍게도 기다란 무대는 반절로 줄어들어 있었다. 강강술래 극장의 운영에 적자가 쌓이자 견디지 못한 경영주가 극장을 반절로 축소시켜 버렸다는데,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대관계약 이전에 그렇게 축소한 것인지. 계약 이후에 축소한 것인지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무대도 반절 객석도 반절로 줄어든 공간이 어찌나 옹색했는지, 난 이곳이 강강술래 극장이 맞느냐고 여러 차례 되물었다. 긴 무대를 염두에 두고 연습했던 배우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오늘날 한국 연극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극장 대관이다. 한마디로 극장을 잡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이다. 극단이 자체 극장을 갖지 않는 한, 이 어려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그런데 자체 극장을 가질 만한 경제력을 가진 극단이 도대체 몇이나 되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극작가가 극장 탓을 하는 거 같아 민망하다. '세헤라자데' 라면 분명히. 다음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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