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감옥 안, 6개월 동안 수감된 ‘흰얼굴’과 20년 동안 수감된 ‘큰주먹’이 등장한다. ‘큰주먹’은 어머니가 감옥에서 낳았으며 강도, 살인 등 온갖 난 쁜 범죄를 저지르고 오랜 감옥 생활을 하게 된 사나이다. 나갈 수 있다는 희망도 이미 포기했다. ‘흰얼굴’은 파서 누워계신 어머니를 위해 꽃을 훔쳐 큰 주먹과 함께 감방 생활을 하게 됐다. 며칠만 있으면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하루하루를 보낸다. 대판관은 흰얼굴에게 석방시켜 준다고 말하지만, 무슨 일인지 풀려나지 못하고 10년, 20년 시간만 흐른다.
오랜 감방 생활이 지루한 큰주먹은 흰얼굴을 괴롭히며 감방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다 흰얼굴에게서 여자를 느껴 흰얼굴을 겁탈하고,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흰얼굴은 큰주먹의 여자가 된다. 그들은 다정한 애인처럼 지낸다. 또 다시 10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번에 큰주먹은 흰얼굴에게서 어머니를 느낀다. 큰주먹은 자신의 어머니는 매독으로 자신을 낳다 죽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흰얼굴에게 자신의 어머니 역할을 해 줄 것을 부탁한다. 흰얼굴은 큰주먹의 부탁을 들어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간수 1, 2가 쳐들어와 큰주먹을 폭행하고, 흰얼굴을 겁탈한다. 심하게 구타당한 큰주먹은 따뜻한 어머니의 품속, 흰얼굴의 품에서 태아가 된 형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큰주먹은 죽어가며 마지막 자신의 꿈을 말한다. 죄에 의한 구속의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그의 소망은 따뜻하고 깨끗하며 순결한, 죄가 없는 모습으로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다시 어머니의 그 숭고한 자궁 속으로 가기를 바란다.
한편 흰얼굴은 큰주먹을 향한 그리움에 몸부림친다. 마침내 흰얼굴은 받지도 못할 큰주먹에게 편지를 띄운다. 흰얼굴은 편지를 낭송한다. 마지막 대사가 끝나자 흰얼굴은 강보에 쌓인 아이를 안고 등장한다.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얼러준다. 무대 어두워졌다 다시 조명 들어오면 첫 장면과 동일한 장면이 나오다 막이 내린다.

「어머니」는「실내극」의 연장선에 놓이는 희곡이다. 장소는 감옥. 죄수인 ‘흰얼굴’은 ‘한 다발 물망초’를 훔치고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자라면서 “찔레꽃, 제비꽃, 분꽃, 접시꽃, 감자꽃, 봉숭아꽃, 채송화, 백일홍, 모란, 해당화, 진달래, 해바라기, 들국화, 나생이꽃, 작약, 백합, 연꽃, 장미, 복숭아꽃, 금잔화, 매화, 맨드라미, 나팔꽃, 동백꽃” 등으로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든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감옥에서 어머니는 수많은 꽃으로 번역된다. 흰얼굴에게 있어서 세상은 지옥이고, 그 너머 감옥은 꽃밭과도 같다. 큰주먹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 세상은 시궁창이고 감옥은 어머니의 품(자궁)이다. 그런 전제로 볼 때 큰주먹의 온갖 범죄와 그로 인한 수인 생활은 그럴만한 개연성을 지닌다.
한편 「어머니」는 겉으로 보면, ‘큰주먹’과 ‘흰얼굴’ 2명의 죄수의 이야기이다. 둘 다 세상에서 어머니에게서 버려져 감옥에 갇혀있지만 이름에서 느끼는 이름만큼 살아온 인생 역정도 상반된다. 큰주먹은 감옥에서 어머니가 낳은 아이로 강도, 살인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갇혔다. 흰얼굴은 고름냄새에 갇혀 병원에 있던 어머니를 위해 꽃을 훔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처음 두 사람의 만남의 모습은 큰주먹의 힘에 눌린 흰얼굴 모습이었지만 오랜시간 같이 지내면서 둘이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동성연예를 하다 흰얼굴은 큰주먹이 모르는 어머니, 생전 처음 보는 어머니의 역할을 해주며 오히려 큰주먹을 사랑하게 된다.
큰주먹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흰얼굴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기의 모습으로 환생한다. 잘못 보면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사회에 갇혀있는 것을 말하고, 모성의 원형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표현하는 극이다. 그들의 모습은 소외시키고 소외당하고 살아가는 우리들 저마다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기 전에 세상의 사랑인 것 같다. 참으로 슬프고도 심오한 작품이다.

장정일의<어머니>는 그의 신춘문예 당선작<실내극>의 연장선상에 있다.<실내극>에서 아들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끝난다.<어머니>의 흰얼굴이 그 아들을 닮아있다. 흰얼굴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장정일이<실내극>의 두 번째 편을 연이어 쓴 것은 아닐까 한다. 더구나 그의 모험은 처음<실내극>만큼 강하게 와 닿지 않는다. 왜냐하면<어머니>는 마지막에 꿈으로 해결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꿈으로 끝을 냈기 때문에 모든 게 허무하게 끝이 난다. 그게 이 작품이 갖는 한계점이 아닐까 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왜곡되어 있다. 즉, 아들을 구원하는 어머니이자 아들을 오히려 절망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어머니이다.<어머니>역시, 큰주먹을 구원하는 동시에 절망으로 빠지게 한다. 여기서는<어머니>를 흰얼굴로 형상화했다. 장정일은 단순히 동성연애를 다루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이전에 감옥에서 동성연애를 소재로 한 연극도 있었고, 소설도 있었다.<거미여인의 키스>가 그러하다. 하지만, 장정일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것은 단순히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다. 물론, 어머니도 여성이라는 범주에 속하지만 장정일의 어머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머니와는 조금 다르다. 그의 작품 속에 어머니는 왜곡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들을 구원하는 존재다. 즉, 여성에서 더 커다란 이미지로 작용한다. 이는 단순히 아이를 낳는 어머니가 아닌 예수를 잉태한 성모마리아 같다는 느낌을 준다.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왜곡은 그가 원초적인 부분에 집중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장정일에게 여성이란 더 넓은 의미의 어머니란 죄를 지은 아들을 구원하는 존재다. 이는 단순히 생리적이고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오로지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정일의<어머니>는 이 역할을 아이러니 하게도 남자인 흰얼굴이 하고 있다. 이게 이 희곡의 강점이다. 즉,<어머니>는 단순히 여성의 몸으로, 여성만이 경험할 수 없다. 남자였던 흰얼굴은 사랑을 경험하면서 여성으로 거듭난다. 흰얼굴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치 소녀가 사랑을 통해 여성으로 거듭나듯, 흰얼굴은 차차 그 단계를 밟아간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어머니가 된다. 흔희들 여성이 가장 성숙했을 때가 자식을 낳고, 모성애가 발휘될 때라고 한다. 자신의 자궁에서 한 생명이 잉태되고, 9달의 산고 끝에 내 자궁을 가르고 나온 분신을 경험할 때가 가장 여성으로서 벅찬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를 경험하는 것이 남성인 흰얼굴이다. 여기서 성별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게 된다.
장정일에게<어머니>는 아들에 의해 자신을 잃어가는 여성이자 그를 구원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희생과 구원이 함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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