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도야 우지 마라》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1936년 7월에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극장인 동양극장에서 청춘좌에 의해 초연되었고 1938년 1월 설날에 부민관에서 전·후편이 공연되었다. 상연된 첫날부터 대만원을 이루어 광복 전 한국 연극사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홍도라는 기생 출신의 여성과 오빠인 철수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엮어지는 갈등구조에서 당시의 다양한 세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선악의 인물들을 대칭적으로 배치하여 악인에 의한 착한이의 수난을 다룬다. 오빠 철수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는 오빠의 친구인 광호를 만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는데 시어머니의 멸시와 시누이 등의 음모로 시집에서 쫓겨나고 남편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된다. 절망의 끝에 몰린 홍도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남편을 가로채려는 약혼녀에게 우발적으로 칼을 휘두르고 순사가 된 오빠에게 끌려간다. 이 작품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서생인 월초인데, 그의 야비한 계략에 의해 비극이 시작되고 그의 고백에 의해 극중 사건이 해결되면서 결말을 맞는다.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인 '잘 짜여진 극(well-made play)'으로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예기치 않은 반전으로 주인공을 궁지에 빠뜨리고, 서스펜스로 관객들의 흥미를 고조시키다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주인공의 위기가 해소되며 논리적 해결에 이른다.

당시에 '고등신파극'이라고 불리기도 한 '한많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은 당대의 가장 중요한 관객인 화류계 여성들의 처지를 대변하여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식민지 시대의 삶의 한 전형을 제시하고 과거를 문제삼는 시어머니의 편견과 그녀 자신의 콤플렉스, 유학생과 경관이라는 중간계층과 기생과 하류계층 사이의 신분상의 장벽 등을 다루고 있어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당시의 결혼 풍습에서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풍자하고 사랑보다는 지위·신분을 따지는 상황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처한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겨 있고 그 시대의 배금주의적 세태를 고발하였다. 또한 홍도가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홍도의 순정을 깨닫게 하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950년 말에 영화화되었다.

요즘 연극계 일각에서 신파나 악극에 대한 공연이 심심치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연극사의 시각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연극예술의 관점에서는 비판적으로 보는 실정이다. 그러나 정작 악극이나 신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젊은이는 횡설수설하거나 정확한 전체규명도 못하는 형편이다. 굳이 말하자면 연극진행 과정에서 적절한 장면이나 막 사이에 대중가요를 삽입시키는 연극 정도로 밖에 모른다. 게다가 같은 악극인데도 어떤 것은 가극(歌劇)이라고 그 호칭을 달리하는 경우도 연극사에서는 찾아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악극(樂劇)의 정체란 무엇인가.
1940년 12월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조선총독부가 그 당시의 전시체제에 발맞추어 이른바 신체제 실시의 일환으로 연극계에다 하나의 통제와 어용의 도구로 쓰기위한 의도적인 계획에서였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하는 연극은 이른바<국민연극>이요 연극인도 전쟁완수를 위하여 헌신하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조선연극협회>산하단체로 9개 극단이 가입되었는데도 악극단이나 가극단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즉 아랑, 청춘좌, 호화선, 황금좌, 연극호, 예원좌, 노동좌, 고협 그리고 유일하게 판소리 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그것이다. 그리고 2년 후인 1942년 조선연극협회가 해산되고 <조선연극문화협회>가 발족되어 2회에 걸친 연극경연대회에도 악극은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악극은 연극에 비하여 예술성이나 연극성이 낮으며 그것이 이른바 오락성 또는 눈요기감으로 여겼다는 하나의 반증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연극인들 자신도 순극단체와 악극단체를 엄격히 차별하여 악극인은 자기들보다 낮은 수준에 있다고 자부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연극도 이른바 신극과 신파로 나누어졌으며 그러한 자부심을 강하게 풍긴 측은 신극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악극이 왜 그렇게 천대받았을까라는 문제가 남게 된다. 그 첫째는 작품(희곡, 연기, 연출, 미술)의 문학성 및 예술성의 저질이나 천편일률적인 인정비극이나 화류계 비화에다가 권선징악이나 계몽주의적인 것이 태반이며 비현실적인 표현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삽입된 노래 역시 유행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곡이고 보면 지식인들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악극의 기세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비예술적이건 비문학적이건 악극을 사랑하는 대중은 엄연히 있었고 그것은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 각지까지도 순회공연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어느 의미로는 악극이 순극보다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연극계 일각에서는 언제까지 저질이라고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악극의 질적향상으로 대중을 끌어올리자는 의식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그 지도자급 인사가 언론인 설의식, 서창석 그리고 작곡가 안기영 등이다. 그리고 단체이름도 악극단이라고 하지 않고 가극단이라 불렀다. 서창석 작인<콩쥐팥쥐>,<견우직녀>는 안기영이 작곡하고 테너 송진혁과 김백희가 발탁되어 수준 높은 무대를 보이기도 했다. '라미라'나 '반도가극단'이 그 예이다. 이런 현상을 그 당시 극장 황금좌 직영으로 '성좌가극단'과 약초극장(지금의 스카라극장) 전속으로 '약초가극단'이 탄생하여 동가에서 연출, 작곡가, 안무가를 영입하여 질 높은 악극을 보여주는데까지 이르렀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극단이 우후죽순처럼 생긴데 힘입어 악극단의 기세도 날로 번져갔다, 연극인과 악극인의 대립이나 적대관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살펴보면 결국 악극이란 순수연극하고는 또 다른 장르이자 대중성과 오락성을 위주로 하는 상업주의 연극이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계에는 이상하게도 악극계의 연기자가 대거 진출하였다. 황해, 허장강, 이예춘, 이경희, 도금봉, 전옥, 장동희, 김희갑, 구봉서 등 황금스타는 거의가 악극출신이었고 연극계로는 김동원, 김승호, 황정순, 최남현, 주선채, 장민호 등 주로 극단 신협 출신이 대중을 이루었다. 이 영향으로 극단도 악극단도 사양길로 접어들고 서울공연보다는 유랑극단으로, 그리고 써커스단의 일부로 합류하여 시골장터나 가설극장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게 악극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악극을 한다는 소리가 높다. 옛날의 감개와 환상과 향수를 올드팬들에게 안겨준다는 소박한 기획정신은 어느 의미로 봐서는 값진 시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제대로 된 악극무대라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 악극이 아닌 굳이 ‘가극’이라고 간판을 바꾸었던 순구자의 유지를 잇는다면 새로운 극본에 새로운 작곡으로 창의성에서 출발할 이 시대의 악극이 필요하다. 단순한 재생이 아닌 진정한 창조적 악극이기를 바란다.
참고 : (<홍도야 우지마라>프로그램, 차범석, '악극에 관하여')

우리 나라에서 ‘신파조’란 질 낮음, 촌스러움, 싸구려, 무식함 등의 가치평가에 해당하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신파와는 별 관계가 없는 측면도 신파조라는 말로 욕을 먹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20세기 이래 우리 나라의 가장 대중적인 극양식인 신파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1910년대 일본에서 이식되어 30년대 동양극장 연극들에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우고, 1950년대 악극과 유랑극단 연극으로 공연예술로는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그 성과가 영화와 방송드라마로 옮겨가 1960,70년대까지 그 위세를 떨쳤던 신파양식은, 이제 (신파가요라고 할 수 있는 트로트 가요와 함께) 확실한 쇠락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제 신파를 이해하는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사람들은 50대 이상의 노인들뿐이다. 90년대 한국인들에게 신파는 더이상 눈물과 통곡을 수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스꽝스러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락 시간에 촌극을 한답시고 “수일씨이!”, “놔라, 놓으라니까! 바지 찢어진다.” 하는 대사를 과장된 일본식 억양으로 읊어대는 것을 보면서 깔깔댔던 기억을, 장년층인 30대와 40대 초반들조차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신파극은 우스운 것이다.
1년여 전 93년 극단 가교에서 스타 배우들을 내세워 중년·노년층 대상의 흥행에 성공했던<번지 없는 주막>역시 그 재미는 ‘우스꽝스러운 신파조’였다. 50,60년 전이었다면 어김 없이 흑흑거리는 눈물 짜는 소리가 들렸을 법한 장면마다, 배우들은 신파조를 더 과장하여 관객을 웃겼고 90년대의 관객은 폭소를 터뜨렸다. 신파로서는 비참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공연한<홍도야 우지마라>는 우스꽝스러움을 가능한 한 제거하고 원래 신파의 비애감을 되살려 내었다. 다소 지루한 듯한 전반부를 지나서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관객은 신파적 갈등에 빨려갔다. 마지막 부분 노복(老僕)이 홍도의 무죄를 밝히는 장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박수는, 60년대 영화관에서 들은, 죄 없는 주인공이 처형되기 직전 특사가 “어명이오!”를 외치고 달려오는 장면에서 쏟아지는 박수 이래 얼마나 오래간만에 듣는 것이었던가.
이렇게 신파적 비애감을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하게 된 데에는, 한편으로는 30년대의 최고 흥행작에 속하는 원작<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임선규 작)가 가진 잘 짜여진 구성력 덕분이다. 돈 없는 집안의 딸로 태어난 죄로 기생이 되고, 기생이 된 죄로 미움 받고 모함 받고 쫓겨난다는, 굽이굽이 기구한 전형적인 신파 줄거리로 잘 짜여진 구성은 여전히 슬펐다. 90년대와 30년대의 긴장을 유지하며 현재의 관객 앞에서 이를 잘 살려낸 연출도 이러한 신파극의 부활에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박수를 칠 정도로 신파적 비애감이 관객에게 전달된 것은,그 관객의 주류가 여전히 50대 이상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화려한 대중적 흥행물로서의 신파 악극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혹시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신파가 가진 자학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눈물의 정서가, 이렇게 아무런 변용과 극복 노력도 없이 부활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신파의 생명력이 끝나가는 시대에, 우리가 한국의 연극사를 생각하면서 해야 하는 신파에 대해 해 놓아야 하는 일은, 신파의 소멸을 애닯아하며 이를 부활하려는 노력을 하는 게 아니라, 20세기 전반의 중요한 대중연극 양식으로서의 신파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단지 촌스럽다는 취향적 판단에 의해 폄하하는 선입견을 버리고 연극사적인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려한 대중적 흥행물로의 부활이나 우스꽝스러운 희극으로의 퇴락이 아닌, 학문적인 고증과 연구에 입각하여 제대로 만든 신파극을 한두 극단이 계승·보존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수천 년 떨어진 희랍의 비극도 끙끙거리며 그 본질적 재미를 감상하는 오늘날의 관객이, 제대로 만들어진 신파극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지 못할 리 없다. 이제 신파극을 이렇게 좀더 객관적으로 다루어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뉴스메이커>, 이영미, 1995년 1월 2일, '90년대 신파극의 존재에 대하여')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영진 '정직한 사기한' (1) | 2018.05.13 |
|---|---|
| 오청원 '한방사람들' (1) | 2018.05.13 |
| 전훈 '회상' (1) | 2018.05.13 |
| 성준기 '훔치고 봅시다' (1) | 2018.05.13 |
| 구상 '황진이' (1) | 2018.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