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후반의 매우 복합적인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발생한 이재수의 난과 방성칠의 난을 집요한 천착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제주도의 역사ㆍ지정학적 의미를 새롭게 재맥락화했다. 이는 한국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이 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재인식해야 하는 것은 사료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이다. 현기영에게 「속음청사(續陰晴史)」가 없었다면 소설의 탄생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소설이긴 하지만 그의 이 작품은 상상력을 최대한 자제한 역사서에 가깝다. 1987년에는 희곡으로 각색되어 극단<연우무대>에서 상연된 바 있다. 이 작품은 조선 왕조 말기에 제주도에서 3년 간격으로 발생했던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이른바 남학당(南學黨)이 주축이 된 방성칠의 난은, 거납 운동으로 시작되어 자칫 반란으로 발전할 뻔하다가 좌절된 비교적 성격이 단순한 민란(民亂)이었는데 비해서 이재수의 난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뒤얽혀 있다.

<변방에 우짖는 새>에서 작가 현기영은, 거납 운동으로 시작된 이 민란에서 어째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희생당해야 했는가? 관에 의한 천주교 박해가 막을 내린지 어언 이십여 년이 지난 시점에 어째서 관이 아닌 민(民)에 의해서 그러한 불상사가 저질러졌는가? 그것이 과연 천주교 측이 주장하듯이 '박해'인가, 아니면 마을 촌로들이 말하듯이 '의거'인가 하는 관점으로, 두 민란의 진정한 성격을 규명하는 데 관심을 쏟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제주도민의 수난사를 민중적 시각에서 면밀하게 재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진 반외세 반봉건의 정신을 되살림으로써 80년대의 중요한 역사소설의 하나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제주 민란을 조명한<변방에 우짖는 새>에서도 외세를 등에 업고 억압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비판되면서 이들을 타도하고 척결하려 하였던 주체 역시 기층 민중임이 확인되고 있다. 이 점은 실제 공연된 작품 분석을 통해 실증되어질 수 있다.
<변방에 우짖는 새>(현기영作.장제혁 演出, 극단 황토 36회 공연 작품, 전북 예술회관 대극장, 88년 2월 21일∼23일)에서 작품 제목은 작가의 시각이 중앙에서 지역을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변방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면 또 다른 명칭도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제목이 주는 일방적 인상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묘사하여 주고 있다. 구한말의 격동기는 단순한 왕조사의 서술 만으로 충분히 창출되기 힘들다. 새로운 종교의 이입, 그로 인해 파생되는 민속 신앙과의 갈등과 대립, 아울러 구미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나라의 정세, 이를 무기력하게 방관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민중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궐기하는 여러 형태의 꿈틀거림이 있다. 이 같은 요소들을 작품의 전면과 배면에 유기적인 연결 고리를 갖추어 형상화하기란 꽤 어렵다.

작가 현기영은 바로 歷史에 기록되지 못한 다양한 삶의 파노라마 중 제주도 이재수의 난에 그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의 우수성은 부정적인 시각에서 조명되어 왔던 변방의 민란을 다양한 안목으로 통찰할 수 있게 했다는 데에 있다. 천주교의 전래 과정 역시 열강의 식민 정책의 일환이라는 사실은 이미 역사가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천주교 전파의 어려움은 종교와 정치의 부정적 야합을 초래케 한다. 왕조의 고갈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또 다른 명목의 세금이 징수되지만 거센 반발을 받기에 이른다. 천주교를 믿는 者만 세금을 반감 받을 수 있다는 명목도 전혀 설득력 있는 미끼 역할을 하지 못한다. 종교를 악이용하려 했던 관리와 그들의 폐해는 급기야 민란을 발생케 하는 요인이 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교인들이 피해받는 걸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제주도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구마슬 신부의 잔인성은 오염되고 일그러진 종교인의 일면을 일깨워 준다. 특히 간신배 최형순은 자신의 귀양살이를 천주교라는 허울로 위장시켜 제주도 백성들에게 갖은 만행과 박해를 일삼기에 이른다. 작가의 시각은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부정적 측면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신학문을 탐구하려는 양베드로의 存在는 종교의 긍정적 요소를 새롭게 조명하는데 기여한다. 자신의 죽음을 끝으로 더 이상 신도들이 박해 받지 않도록 간청하는 그의 순교자적 정신과 박애 사상은 감상층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준다. 종교의 전래 과정에서 불거져 나오는 모티브로 바로 민중들의 항거를 들 수 있다. 역사에 단지 이재수의 난으로 희미하게 기록되었던 사건을 작가는 그들의 토속적인 정서 안으로 파고들어가 제주도 백성들의 진솔한 세계를 해부하고 있다. 양반이나 지배계층의 종 노릇을 해왔던 이재수(정진권扮)의 항거 활동 그리고 관료들의 이용품에서 도태당한 퇴기 만성춘(고미화扮)의 활약은 민란을 의거로 격상시켜 정당성과 순수성을 회복시키는데 기여한다. 세금 징수를 위한 관의 횡포와 종교 전파를 위한 프랑스 신부 구마슬의 방약무인적 행패는 급기야 순박한 백성을 항거의 선봉대에 서도록 유발시키고야 만다. 자족성과 독립성을 획득하려는 민중들의 끈질긴 의지는 왜적을 물리치는데서부터 그 싹이 드러나며 이들은 마침내 프랑스 신부의 부조리를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수많은 살상이 동반되는 항거 과정에서도 그들은 인명을 중시하는 슬기를 보이기도 한다. 제주도는 이재수가 이끄는 민중 항쟁에 의해 평정을 되찾지만 조정에서 파견된 찰리사(이덕형扮)의 농간과 프랑스 군함의 무력 진압은 엄청난 대량 학살을 초래한다.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시체 더미에서 사랑하는 님을 향해 내뱉는 여인의 절규는 관객 모두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공연은 순환 구조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에 감추어진 엄청난 대학살을 클로즈업시켜 놓고 있다.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 극의 처음과 끝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면서 현실과 초현실이 교차된다. 양베드로의 죽은 모습은 초현실 세계의 인물로 환원되어 나타나 歷史의 진실을 밝혀내는데 기여한다. 할미탈이 장대 위에 설치되어 있고 죽은 시신들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삽입되어 있다. 탈의 삽입은 저승 세계에 충만된 수많은 원혼의 存在들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민란의 실체를 일방적으로 제시하려는 지나친 교훈성은 이 공연에서 자제되어 있다. 죽은 者들의 言語는 탈을 통해 시각적 변용을 가져왔고 님을 잃은 퇴기 만성춘의 절규를 통해 또 다른 미적 체험을 불러 일으켜 준다. 아울러 관료의 부조리상과 성직자의 헝클어진 모습은 민중 봉기의 당위성을 부각시키는데 기여하면서도 진실된 믿음의 세계란 항상 어렵고 요원한 숙제임을 비유적으로 환기시켜 준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구현시켜 놓은 종교 음악은 좌절과 번민에 싸인 양베드로의 신앙적 갈등을 증폭시키는에 기여한다. 동시에 "민중 봉기를 주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하며 노심초사 불안해 하는 강별감의 번민은 황제의 칙령에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통해 더욱 증폭된다. 선율이 섬세하게 삽입됨으로써 등장인물들의 딜레머는 관객 모두의 딜레머로 전이, 확대되어진다. 아무튼 이 작품에서도 양반들의 노비나 그들의 놀이개로 이용당한 퇴기 만성춘 등이 문제점을 올바로 직시하고 각성하여 불합리한 현실과 외세의 침탈에 주도적으로 항거한다. 이들 민초들의 형상은 당국자의 농간에 의해 처참하게 순교당하고 황폐한 곳에 내팽개쳐질지라도 죽음 이후의 초현실 세계에서 마저 이들의 소망과 이상은 불변할 뿐이다. 이 같은 메시지가 뜨거운 감동과 더불어 관객 모두의 의식과 가슴을 관통함으로써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민중의 역할과 사명을 우리는 진지하게 인식하게 된다. 작가 현기영은 이들 기층민들의 행위 다시 말해 소위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역사 속의 일부 편견이나 부정적 통념을 불식시키는데 관심의 촛점을 집중시켰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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