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태웅 '반성'

clint 2018. 3. 19. 11:06

 

 

 

장성한 자식들이 아버지와 함께 둘러 앉은 아침상.

자식들은 어릴 적 아버지가 주신 헌금을 모아 기타를 샀던 일이며를 이야기한다.

가족이란 이렇게 낡았지만 오랫동안 간직한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들이다.

아버지는 흐뭇하게 자식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가족들의 행복한 식사라 할만하다. 어젯밤 서로에게 퍼붓던 원망과 독설들은

한이불 덮고 함께 자고 나면 이렇게 스르르 녹아버린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한 식사는 곧 끝이 난다.

몸을 뒤틀며 모두 쓰러지는 것. 조금 전 그 행복한 식탁을 마련한 어머니가

자기 몫의 죽을 들고 나와 떠먹으며 말한다.

“여보 나를 용서해요”라고.

 

 


김태웅이 쓰고 연출한 《반성》은 이렇게 끝이 난다.

가족들의 집단동반자살이라는, 그것도 어머니에 의한 죽음은 충격적이다.

흔히 그리고 유독 한국사회에서 ‘어머니’는 모든 죽음을 대신하는 인물이지

죽음을 집행하는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왜 이 가족은 아버지의 생일을 맞아 모처럼 모여

함께 먹는 아침상에서 죽음을 맞아야 할까.

 

 

 

 


연극 《반성》을 한 가족의 이야기로 보자면 이 충격적인 마지막 결말은 한 노부부의 속죄의식이라 할 것이다. 한켠 테이블에 조용히 찬송가가 흘러나오는 녹음기와 찬송가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노부부의 거실. 아내는 앞마당 텃밭에서 뽑은 배추로 토장국을 끓이겠다하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가볍게 끌어안고 노인대학에서 배운 춤을 춘다. 여유로운 평온한 노년의 모습이라 할 만하다. 쇠약해져가는 심신이 심상찮다는 것 말고는. 5년 전 큰 수술을 받은 남편은 건강이 좋지않다. 그렇다하더라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할만하지 않은가.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듯 남편은 자신이 죽은 후 남은 재산을 분배하는 유언을 녹음하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며 고백을 한다. 자신의 친구이자 아내의 전남편인 은봉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자신의 살인이었다는 것. 노부부의 지극한 사랑은 이렇게 무서운 ‘죄’에서 시작된 것이다. 죽어가는 가족들 앞에서 아내는 “내가 당신을 따라 나선 것을 용서하고 내가 당신을 마음에 품은 것을 용서해요. 내가 당신 자식들 낳고 기른 것을 용서해요”라고 말한다.

 

 

 

《반성》은 이렇게 숨겨진 과거, 비밀, 과오와 죄가 밝혀지는 데에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소포클레스(《오이디푸스》)에서 입센(《인형의 집》)에 이르기까지 많은 드라마들의 전개는 숨겨진 과거를 드러내는 과정인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의 막바지에 이르면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바로 아버지인 라이어스 왕을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노라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 집에서 한갓 인형이었음을 알게 된다. ‘진실’에 대한 인식은 눈을 찌르고 집을 나서는 행동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따라서 드라마는 우리가 어떻게 가리워진 진실을 찾아갈 것인가에 드라마의 목표가 놓여진다. 진실을 인식하는 것이 왜곡된 현실,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인 것이다. 반면 《반성》은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는 데에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남편은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자 진실은 밝혀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는 무엇이란 말인가. 예의 드라마에서는 이제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행동이 즉각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은 곧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오’가 드러나는 데에서 시작하는 《반성》에서 ‘행동’은 극의 결말에서야 잔혹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왜 ‘행동’은 지연되는가.

 

 

 

《반성》을 쓰고 연출한 김태웅은 프로그램에 이렇게 적고 있다. “... 하지만 우리 삶과 역사에 있어서 단 한 번만이라도 엄격하고 단호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한 고통을 감수할 만큼 당대하고 강직할 수 있다면, 관용과 용서를 종교적 허울 속에 가두지 않는다면..” 그가 말하는 엄격함과 단호함은 결말의 ‘잔혹한’ 죽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달았다 할 때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한다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엄격하’고 ‘단호하’게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대면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반성》은 깨달음과 행동 사이에 간극을 벌려놓음으로써 죄의 인식과 속죄 그리고 용서의 문제를 드라마의 중심에 놓는다. 남편은 평생을 간직했을 죄를 고백하면서 아내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그런데 그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아내인가 신인가. 또 그의 죄는 어떻게 용서받아야 하는가. 남편의 고백은 동란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기억과 이어져있다. 그일이 아니었어도 친구는 동란 중에 죽었을 거라 말한다. 보도연맹이다 친일파다 부역이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라면서. 그것은 통렬한 고통을 숨기기 위한 가장인가 아니면 끝내 마주대하지 못하는 고통의 회피인가. 손주도 사위 며느리도 다 남이라며 노부부와 세 자식 이렇게 ‘식구끼리’만 모인 아버지의 생일 저녁 이 오랜만의 만남은 미처 풀지 못한 증오의 날로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들쑤시며 분노와 아픔으로 뒤범벅이 된다.
입덧이 심한 아내에게 잣죽을 먹이기 위해 친구와 함께 잣을 따러갔다가 친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내와 남편을 죽인 친구가 가정을 이루어 살았던 이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용서받아야 할 것인가. 이 가족의 아내이자 어머니는 집에 불을 놓고 식구들 모두와 함께 잣죽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죽음을 맞는다. 일견 종교적 의식을 상징하는 듯한 그러나 드라마의 상황에서 자라나온 이러한 잔혹한 결말은 그 행동의 잔혹함에 앞서 흔히 쉽게 말하는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통렬한 고통을 수반해야 하는 것인가를 새삼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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