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한반도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판의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 세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작가인 나의 본 뜻이다.” 황석영(작가)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떠도는 유랑이며 손님이다. <손님>은 한국의 큰 작가만이 쓸 수 있는 한국인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오래 오래 읽힐 것이며 당연히 대학의 필독서 목록에 오를 것이다.“ 도정일 (문학평론가, 경희대교수)
“황석영이기에 가능한 또 한번의 처절한 영매술이다. 책을 덮자 방금 긴 악몽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너무도 생생한 분단의 반세기의 처절한 영혼이 여기 숨쉬고 있다. 황석영이기에 가능한 또 한번의 큰 현실이다.” 임규찬 (문학평론가, 성공회대교수)
“우리 문학이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작가 황석영은<손님>을 들고나와 ‘미몽’을 흔들어주었다. 분명 이 작품은 우리 문학의 획기적인 전환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김재용(문학평론가, 원광대학교교수)
<손님>을 읽고선 정말 감동했습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다면적으로 확실하게 포착한 데다 적대세력 사이의 화해가 가슴을 울릴 만큼 강력하게 표현돼 있습니다.<손님>의 영어판의 추천서에서도 썼지만,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소설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작가가 황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벨문학상수상자 오에 겐자부로와의 대담, 2005.8.15자 한겨레)
1950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이 땅에 들어와 엄청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여러 인간군상의 원한과 해원을 그려냄으로써 이 소설은 화해와 상생의 무드에 접어드는 21세기 한국사회에 커다란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다 (2000~2005 시대의 중심에 선 책 1위, 한겨레선정)
주인공은 고향방문단 일원으로 북을 방문 하기 사흘 전에 형의 죽음을 듣는다. 입관 예배를 마친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기묘한 일을 겪게 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손님 자격으로 고향을 찾아가는데...<황해도 진지노귀굿>을 기본 얼개로 하여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억울하게 죽어간 혼령들을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세기를 시작하자는 메세지가 담겼다
<손님>은 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북쪽에서 지금도 전쟁 기념절이면 `미제의 소행'으로 대대적으로 규탄해 마지않는 이 사건이 사실은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한 우익 민간인들과 좌익들 사이에 벌어진 비극이었다는 것이<손님>의 관점이다.
여기에 가담했던 인물의 혼령과 미국에 거주하는 그의 친동생을 반세기 뒤의 사건 현장으로 보내, 감추어진 사태의 진실을 들춰내도록 한다. 그 과정을 통해,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두 `손님'이 한반도 민중에게 어떤 작용을 했는가를 따져 보자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 할 수 있다.
<손님>은 또한 벽에 부닥친 듯한 리얼리즘의 갱신 가능성을 모색한 과감한 형식 실험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황해도 지방의 천도굿인 진지노귀굿 열두마당을 소설의 구성 원리로 끌어들임으로써 전통의 문화양식과 소설이라는 근대적 서사양식의 결합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관념의 차이·갈등 문제는 '민족'이다>>장용학의<원형의 전설>이 발간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당시로서는 남북분단의 비극과 그 고통을 금기의 선에 가장 가깝게 끌어 올려 이야기한 문제작이었지만, 그 문제는 크게 거론되지 못했다. 이 소설은 실존주의 문학의 외관을 두껍게 둘러쓰고 있어서, 동족상잔의 전쟁과 그 이후의 민족 갈등은 한 남자의 실존적 자아탐구의 무대 정도로 치부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근친강간으로 태어난 그 남자는 분단된 남북을 넘나들며 제 뿌리를 찾아 헤매던 끝에 저 자신이 근친화간을 감행하는 순간 죽음을 맞는다. 남매가 묻힌 자리에서는 오래 후에 복숭아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는다. 매우 기괴한 이야기지만 주인공이 찾으려 했던 자아 대신에 민족을, 근친강간 대신에 같은 근원을 지닌 자유와 평등의 이상한 분열을, 근친화간의 자리에 민족적 가치의 회복을 대입하면 이 `전설'은 훨씬 쉽게 이해된다. 사실 이 소설에서 장용학의 실존주의는 그 의도를 위장하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의 반쪽짜리 인생을 성찰하게 해준 출발점이었으며, 그 생각의 결과를 지지해 줄 외래의 응원군이기도 했다.
<손님>으로 남북문제의 가장 중요한 금기를 깨뜨린 황석영에게서도, 분단 비극의 핵심을 이루었던 것들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갈등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가지”의 싸움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이 싸움의 시말은 이미 관념들이 관념적으로 싸운 전설이 아니다. 선한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던 것이 어떻게 악독한 열정으로 변질되었던가를, 그 현장에 서 있던 사람의 눈과 그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낱낱이 들추어낸다. 황석영이 소설적 장치로 이용하는 죽은 혼들까지도 환상성보다 사실성이 더 강하다. 갈라 선 민족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증오심과 그에 대한 회한이 바로 그 귀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혼령들이 마침내 “우리는 자기 자신까지도 증오했다”고 말하며, 제 자아로부터 저 “손님”들의 마법을 풀어버리는 순간이 이 비극의 절정이다. 마법의 풀림이 헛된 바람은 아니다. 장용학에게서 관념이었던 것이 이렇게 사실을 확보하고, 거꾸로 제기된 문제가 옳게 서기까지 희망은 구체적으로 진척했다.
그래서 40년 상거에 있는 이 작품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바는 우리에게서 옳은 인식이란 결국 민족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 민족이 근대사에서 입었던 상처는 우리의 모든 사회적·개인적 불행의 뿌리가 되었으며, 계급갈등에서 성갈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갈등의 고삐를 쥐고 있다. 이 정황에선 사회가 열린 정신상태를 지니게 되고 한 개인이 지혜로워진다는 것도, 한 예술가가 숭고한 실체를 예감한다는 것도, 한 문학연구자가 훌륭한 번역론을 착상한다는 것도, 한 수도자가 어떤 특별한 법열에 들어선다는 것까지도, 결국은 민족 화해의 한 전망을 얻는다는 말과 다른 말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민족은 모든 관념어들의 구체적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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