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유한 집안에 얹혀살며 하녀처럼 부림을 당하는 주인공 '오미네'는 빚 독촉에 시달리는
큰어머니를 돕기 위해 단돈 2엔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녀는 주인집 마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애원하지만 거절당한다. 절망한 미네는 결국 주인집의 서랍에 손을 대고,
나중에 2엔을 꺼내 찾아온 동생한테 전한다. 오롯이 돈을 훔쳤으니 죄를 범한 것이다.
이 주인집에 아들인 이시노스케는 부모가 내버린 자식처럼 불량배와 어울리며
집의 돈을 축내는 사내이다. 결국 부친과 싸우고 돈을 주며 집을 나가라고 한다.
아들은 돈을 싸들고 나간다. 그 후, 주인 마님이 경대서랍에 빌려준 돈 받은 게 있다며
서랍을 가져오란다. 그러나 거기엔 텅 비어 있고 거기 쪽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서랍 속 돈도 함께 빌려갑니다. 이시노스케."
그가 오미네의 범행을 덮어주려 한 것이다.

'섣달그믐(大つごもり)'은 메이지 시대 일본 문학의 선구자인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가
1894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섣달 그믐은 삶의 끝자락에서 사람들의 회한과 아쉬움을
그린 작품이다. 한 해의 끝, 곧 다가오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섞여 있으며,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며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직시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놓치고
지나친 것들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이 주요 테마로 다뤄진다.

하녀 오미네의 인생과 삶의 애환을 긴장과 여백으로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데, 하층민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은 민중중심의 사실주의적 소설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주인의 돈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던 하녀의 절박함, 그리고 돈을 훔친 후 들킬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과 조마조마한 심리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돈 몇 푼이 없어
벼랑 끝에 몰린 하층민의 비극과, 그것을 그저 종이 쪼가리로 치부하는 부유층의 모습이
대비되며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인간관계를 해체하는지 보여준다.

히구치 이치요(樋口夏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 작가 중 첫 번째 여성 작가. 24년의 생애 중 숨을 거두기 전 1년 2개월 동안 일본의 근대 문학사에 남는 14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치요는 필명이며 본명은 히구치 나쓰코(樋口夏子)이다. 참고로 이노우에 히사시의 희곡 '달님은 이쁘기도 하셔라'라는 작품에 등장인물로 나온다.
이노우에 히사시 '달님은 이쁘기도 하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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