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프랑스 혁명 전야의 파리 귀족 사회.
사람들은 사치가 극에 달한 감미로운 생활에 취해 쾌락을 추구한다.
사교계의 여왕인 메르떼르 부인은 바람둥이로 유명한 발몬트와 계약을 맺고, 자기를
배신하고 떠난 애인 바스티드가 불랑쥬 부인의 딸 세실을 신부감으로 점찍고 있으니,
세실의 순결을 빼앗아 바스티드를 웃음 거리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발몬트는 그보다는 자기 고모의 성채에 묶고 있는 덕망과 신앙심 깊은 투르벨 부인에게
더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능숙한 언변과 기질을 발휘해 끈질기게 투르벨부인을
유혹하고, 투르벨부인은 마음의 갈등으로 번민에 싸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순수하기
그지없는 세실을 소심한 청년 당스니와 사랑에 빠진 것을 이용하여 결국 임신까지 시킨
악독한 발몬트가 투르벨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 그도 인간이기에 철저히 악할
수만은 없어 투르벨 부인의 선의와 덕성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그것을 모를리 없는
메르떼르는 좀더 잔인한 조건으로 그를 애타게 한다. 발몬트가 투르벨 부인에게 마음이
향할수록 그것은 발몬트와의 대결이 돼간다. 그러나 투르벨부인도 끝내 발몬트를 물리
치지 못한다. 그녀의 선의는 발몬트의 악의를 악의로 분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메르떼르가 내건 마지막 조건은 투르벨 부인과 결별하는 것. 발몬트는 메르떼르에게
허영심으로 눈 멀어 진정으로 사랑하는 투르벨 부인에게 냉혹한 결별을 선언한다.
하지만 메르떼르 부인은 세실의 순결을 빼앗고, 투르벨부인을 유혹하는데 성공하면
자신과 하룻밤을 잘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 투르벨 부인을
사랑하는 발몬트의 마음을 도저히 되돌릴 수 없음을 알게 된 그녀의 자존심이 이제
그런 발몬트에게 자신을 값싸게 내던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서로 정복하고자 하는 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싹트고 그녀의 마지막
거절에 둘 사이에는 전쟁이 선포된다. 발몬트는 메르떼르에게 빠져있는 당스니를 다시
세실에게 돌아가게 하고, 메르떼르는 당스니에게 발몬트와 세실과의 관계를 폭로하여
당스니와 발몬트의 결투로 이어진다. 발몬트는 칼에 찔려 죽어가며, 같은 시각에 배신의
상처로 죽어가고 있던 투르벨 부인에게 자기의 진정한 사랑을 전해달라고 당스니에게
부탁한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고백을 죽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발몬트가 죽기
마지막에 당스니에게 남긴 그간의 이중 성격을 폭로할 수 있는 편지들에 의해
메르떼르는 사교계에서 발도 못 들여놓을 비웃음 거리가 되고 만다.

연극 <위험한 관계>에서 작가 햄튼은 주인공 발몬트의 최후에 비극성을 부여하려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 물론 정신적 지표를 상실한 현대에서 비극적 인간상을
창조한다는 일이 진부하다는 유명한 사실을 햄튼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작가는
고전비극의 패턴을 역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틀에 의하면 고전 비극은 선인이
자신의 비극적 결함에 의해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善人이
파우스트에서 보듯이 악의 유혹을 받는 데서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는 것이 고전 비극의
룰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고전비극의 경우와는 달리 선인이 아니라 악인이다.
물론 단적으로 악인으로 규정짓기란 뭐하다. 왜냐면 위험한 관계의 주인공은 복잡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발몬트와 메르떼르는 단순한 쾌락주의자들이 아니라
도덕적 무정부주의를 신봉하는 극단적 회의론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인생은
보잘것없는 한줌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이들은 철저한
모더니스트들인 셈이다. 이들에게 있어 모더니즘은 신조이자 종교랄 수 있다.
이들을 굳이 통념적 선악의 2분법으로 분류하자면 당연히 악의 무리에 속할 수 밖에 없다.
메르떼르는 그녀의 신조가 투철하기 때문에 비극적 인간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완벽한
악녀인 탓이다. 그런데 발몬트는 그렇지 못하다. 파우스트가 악의 유혹을 받듯이 그는
선의 유혹을 받는다. 발몬트는 마침내 바람둥이의 신조를 깨뜨리고 투 르벨부인에게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되며 이 진실한 사랑의 유혹이 그의 비극적 파멸을 가져온다.
이같이 고전비극의 패턴을 뒤집음으로 해서 작가 햄튼은 위험한 관계에서 현대적 비극을
시도하고 있는데 결과는 어떠한가? '진실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견지하고 있는 관객에게는
성공적이고, 따라서 감동적인 비극으로 다가갈 수 있겠지만 시니컬한 관객에게는
또 하나의 위장된 센티멘탈리즘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1963년에 창단된 극단 민중극단이 1992년에 창단 30주년을 맞아 첫번째 작품으로
공연한 <위험한 관계>는 이미 고전이 된 프랑스의 소설인 라끌로의 원작을 영국의
대표적인 현역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햄튼이 각색하여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로얄 세익스피어 극단'에 의해 1986년 10월에 초연되었다. 초연이래 비 뮤지컬
연극으로서는 최고의 흥행작으로 공연했으며 이례적으로 뉴욕의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하여 절찬을 받았으며 현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1986년에 영국에서 주요
시상식에 5개의 최우수 희곡상을 모두 휩쓸어 버릴 만큼 작품으로서의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아 영국현대희곡문학의 큰 수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민중극장의 한국초연에서 여주인공 메르떼유역은 여배우 김성녀씨가 맡고
발몬트역은 곽동철씨가 맡았다. 연출은 정진수.

18세기 말의 프랑스 상류사회의 사교계를 주 무대로 펼쳐지는 <위험한 관계>는
상류사회의 초도덕적인 풍속도를 그려낸다. 우아하고 세련된 사교적인 대화 속에
은폐되어 있는 도덕적 타락과 부패, 그리고 격조있고 품위있는 매너로 위장된 향락과
퇴폐를 고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메르떼유는 삶의 근원적 허무에 눈뜨게 되고
바람둥이 발몬트는 진실한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런던 연극계에서도 드물게 보는
고품위의 연극대사와 뛰어난 성격창조로 수준 높은 희곡 작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위험한 관계'는 프랑스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59년 로제 바딤 감독에 의해 동명의 타이틀로 최초로 영화화된 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차례에 리메이크 된 바 있는 명작으로, 영화로 더욱 알려진 작품이다.
동명 영화가 있고 발몽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으며 한국판으로는 배용준과 이미숙
전도연이 주연한 이조상열지사 스캔들이 있다. 최근 장동건, 장쯔이 주연의
<위험한 관계> 영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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