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함세덕 '고목' (윤색 공연 작품)

clint 2025. 9. 21. 08:06

 

 

장마와 폭우로 마을 가옥이 침수된 어느 날, 
오각하가 마을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을 사람들은 오각하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렌다. 지주인 박거복도 삼대째 내려오는 500년 된 은행나무로 
바둑판과 화로를 만들어 오 각하에게 바쳐 미군정 아래에서 자기 지위를 
확보하고자 한다. 박거복은 생계를 꾸릴 밑천으로 삼기 위해 나무를 팔라는 
처남 영팔의 부탁과 수해 복구를 위해 나무를 기부해달라는 청년 지도자 
하동정의 청을 거절한다.
오 각하가 도착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을에 모여든 사람들의 함성과 
이제 막 발표된 애국가의 합창 소리가 점점 커진다. 커지는 소리와 비례하여 
인물들의 갈등도 고조된다. 500년 된 은행나무를 둘러싼 
박거복, 곽목사, 윤군수 등 구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과 
지식인 청년들,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젊은 일꾼들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극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함세덕 작가의 <고목>은 해방 직후 극심한 혼란과 첨예한 갈등 현장을 연극으로 

기록한 르포르타주와 같다. 당시를 직접 겪지 않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문제인 서로를 반목하게 만드는 해묵은 이념적, 사회적 갈등의 밑뿌리를 보여준다. 

1940년대와 2020년대, 시대는 다르지만 갈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한국사회 갈등의 연원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헤본다.
함세덕 작가의 작품을 조정일이 윤색하였고, 

전인철 연출로 극단 돌파구가 2024년 3월 공연하였다.

 



함세덕이 쓴 희곡 <고목>은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국민문학≫에 발표한 단막극 <마을은 쾌청>을 개작해, 해방 후인 1947년 4월 ≪문학≫에 발표한 3막극이다.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조치 이후 남한에 현존하는 마지막 희곡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지주인 박거복의 고목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벌어지는 계급 갈등 및 지주와 정치 세력의 결탁을 형상화했다. <고목>은 한정된 시간 내에 '고목의 용도'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욕망으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이 극적으로 연출된다. 희곡은 고목이 상징하는 바를 명료하게 드러내면서도, 당시의 이념·경제·세대 갈등이 거복을 둘러싸고 치밀하게 전개되도록 짜여 있다. 특히, 고목이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람들의 환호와 거북의 아쉬움을 팽팽한 긴장 상태로 그려내는 극작술은 힘의 균형을 유려하게 보여준 장면으로 여전히 평가받는다.

 

 

 

연극 리뷰

동시대 담론과 논쟁을 극단 돌파구의 방식으로 용해시켜 오고 있는 전인철 연출의 이번 작품은 해방 직후 발표된 월북작가 함세덕의 <고목>(1947)이다. 전인철은 극의 배경과 시공간, 장면전환과 등퇴장, 상황 안에 나열되어 있는 극 중 인물들을 점층적으로 무대와 구조로 나열하는 방식에서 동일구조로 묶는 방식으로 전환해 텍스트에 내포된 의미를 가공해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 <고목>은 80여년 전 희곡을 전인철의 형식으로 현재화하는 데는 성과가 있었음에도 희곡이 지닌 한계와 전인철의 연출 방식이 완전히 용해되었다고는 볼 수는 없다. <고목>은 해방 후 미군정 시대부터 제헌국회 정국에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정치적 분열과 갈등, 친일청산과 좌우 이념 대립이 난무하던 1946년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함세덕의 <고목>이 이승만 대통령을 연상하게 하는 극 중 인물 '오각하', 영팔과 영팔의 처, 목에 혹을 달고 사는 지주 박거복을 통해 1940년대 해방공간의 좌우대립을 그려낸 희곡이라면, 전인철의 <고목>은 여전한 좌우 이념 갈등,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부의 욕망과 양극화, 친일잔재의 부가 세습되는 현실을 타격한 공연이다. 극중인물 박거복은 특정 보수정치인 혹은 부가 세습된 재벌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고목>은 1940년대의 사회적 논쟁(농지개혁, 친일청산, 수립정부의 정통성)을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정치를 환기한다. 
극의 시간적 배경은 해방 이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과 미군정의 국민동원령에 의해 국가재건이 시작되던 시기로, 좌우익의 분열과 대립이 극심한던 때다. 공간적 배경은 마당의 500년 된 은행나무를 잘 지키라는 선친과 조상의 유언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박거복의 집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유례없는 대폭우로 마을의 수백 가옥이 물에 휩쓸려간 1946년 7월, 미군정 통치하에 당대 우익정치의 선봉에 서있던 오각하가 마을을 방문해 강연한다는 소문이 돈다. 거복의 처남 영팔은 해방 후 일본 육군 창고 물품을 불하받아 떼돈을 번 돌쇠가 딸의 혼사 장롱 목재로 쓸 수 있도록 거복의 집 마당에 500년 이상 자리잡고 있는 고목을 3천원에 팔라고 한다. 청년단원 하동정 역시 수해구제금으로 쓸 수 있도록 고목을 기부해 달라고 부탁한다. 공연은 초반부터 고목을 둘러싼 박거복과 영팔, 하동정, 노모, 박거복의 처, 마을주민들의 갈등이 하나씩 제시된다. 애국당의 당원(재정부장)인 자신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행자 목재로 화로와 장기판을 만들어 기부하기로 결심한 거복은 기부 의사를 밝히고자 노모(김은희 분)를 강연회에 보내지만, 노모는 오각하의 부인이 양국(洋國) 여자라는 이유로 기부를 하지 않고 돌아온다. 결국 애국당의 재정부장 직책에서 밀려난 거복은 홧김에 오각하에게 기부하려던 고목을 수재의연금으로 기부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마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잘려나가는 고목을 붙들고 절망하고 있는 거복의 모습이다. 2막 중반까지 다소 느슨했음에도, 함세덕의 <고목>이 전인철 <고목>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마을 내 절대적 부와 권력(자)의 욕망으로 형상화된 오색 이불보를 덮어 쓰고 고목이 베어 나가는 순간을 울음으로 삼켜낸 거복 역의 배우 김정호의 역할이 컸다. 고목으로 오각하 정치권력과 미군정에서 야심을 키웠던 거복의 심리적인 몰락으로 삼대를 지켜온 고목은 비로소 타인의 소유로 잘려 나간다. 전인철의 <고목>은 거복의 집 마당에서 잘려나간 고목처럼, 친일청산과 역사적 과오가 청산되었을 때 대한민국 애국가가 하나 된 소리로 불려질 수 있기에 전인철은 <고목>을 통해 과거 역사의 잔재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희망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21세기의 젊은 세대가 바로 무대에 등장한 20대 청년들이란 점은 분명하다. (김건표: 연극평론가) 

 

 


극작가 함세덕 (1915.5.23 - 1950.6.29)
1915년 인천에서 태어나 줄곧 학창시절을 보낸 함세덕은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은행에 취직하는 상례를 버리고 돌연 서점에서 근무하며 글쓰기와 연극에 심취한다. 1936년 21세의 나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온 희곡작가 유치진과 교류하게 된다. 함세덕이 극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한 시기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로, 이때 친일 국민연극 단체였던 '현대극장'에 참여하며 친일 연극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해방을 맞은 함세덕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또 한 번 발빠르게 변신을 시도한다. 1947년 동료 연극인들과 뒤늦게 월북했다가 1950년 35살의 나이로 전쟁 중에 사망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번안과 각색을 포함해 장·단막 모두 24편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산허구리>, <동승>, <기미년 삼 월 삼 일>, <무의도 기행>, <태백산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