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창남 '상처꽃'

clint 2025. 9. 15. 16:29

 

 

재판정에 들어선 피해자들인 문성재, 서우영, 배익두, 송인숙. 
그들은 노년이 되어서야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재심청구에서 
재심 개시를 결정 받는다.
나치를 경험한 독일의 목회자인 마틴 니묄러가 지은, 국가폭력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과 방관을 반성하는 성찰적 운문에 맞추어 긴장된 몸부림이 전개된다.
재심재판을 준비하는 하나의 중요한 고리로 피해자들은 상처꽃 치유센터 
소장 유화경의 치유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조심스레 명상치유를 시작한다.
간첩학계의 거장 안홍춘 박사의 간첩특강을 통해 70년대의 간첩표어들로 
코믹한 만담이 전개되는 가운데 간첩단 조작 사건의 배경과 진실이 드러난다.
피해자들은 40여년 전 체포되어 취조 당하던 상황을 각각 재현한다. 비록 
연극으로 당시 기억을 마주한 그들은 여전히 깊은 고통과 슬픔을 드러낸다.
간첩특강에서 언급된 간첩조작이 관계기관 내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어처구니없는 과정이 마당극적 역할놀이로 표현된다.
고문이라는 부당한 국가폭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들의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 후유증이 각각 드라마로 또는 거친 독백으로 형상화된다.
시사토크 형식으로 고문 가해자들의 안하무인격인 모습이 그려진다. 
사회자의 날카로운 질문과 재치 있는 대응으로 고문 가해자들의 폭력성이 
촌철살인 풍자된다.
다시 '그들이 왔다'를 반복함으로써 작품의 동시대성을 은유적으로 담는다.
모진 상처 끝에 돋아난 희망의 새순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한다. 
가혹한 시련의 고통 속에서 절망 속에 핀 희망, 
상처꽃이 서서히 아름답게 피어난다.
재심에서 이들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는다.

 



부당한 국가폭력에 몸과 마음을 무참하게 유린당한 피해자들의 치유과정을 담은 <상처꽃>는 서사치유연극을 표방한다.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원한 맺힌 삶의 이야기는 에피소드적으로 반복 전개되며 비극적인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억눌리고 숨겨진 감정이 정화되고 상처 받은 인간의 영혼이 치유되는 것이다. 극중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그림과 노래는 예술심리치료의 기능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치료의 주된 목표는 원인을 규명하기보다 증상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흔의 쓰라린 고통을 달래는데 미술과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화와 예술치유의 미학은 다시금 상처의 본질과 마주하기 위해 서사극(epic theater) 형식에 담겨진다. 막과 막 사이를 이어주는 해설, 감정이입의 고리를 차단하는 막간극들, 빈번한 영상과 자막삽입 그리고 쏟아지는 듯한 피해자들의 구술적 모노드라마 형식 등을 통해 이 연극은 일반적인 드라마적 구성을 벗어나 감성과 이성의 얼개고리를 형성한다. 피해자 개개인의 문제가 곧 우리 공동체의 문제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서사치유연극이라 할 수 있다. 
 

 


<상처꽃-울릉도1974>는 한국의 대표적인 마당극 연출가 임진택과 일본 현대연극의 거두인 김수진의 만남에서 그 구체적인 연출 방안이 마련되었다. 마당극에 근간을 이루는 탈춤의 중요한 미학을 김지하는 '환'(고리)이라 언급한 바 있다. 과거와 미래가 극이 생성되는 현재의 구조 속에 살아 있으며 이는 끝과 시작이 끊임없이 현재 속에서 순환하면서 확대되는 환의 원리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선형적인 뫼비우스 띠와 같은 구조 속에서 신명이 순환하는 동안 인간의 맺힌 원한이나 패인 상처들이 어루만져지는 것이며 이는 굿과도 같은 치유기능으로 작동한다. <상처꽃-울릉도 1974>에 등장하는 피해자들의 상처는 과거와 미래가 이어져 있는 치유센터라는 현재 공간에서 치유의 연극적 형상화인 모노적 구술 장면의 반복을 통해 순환하며 확대되는 환의 원리로 치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막간극들은 풍자와 해학을 가미하여 극의 신명을 더욱 고조시킨다. 이와 같은 마당극적 구조 윈리에 김수진의 연출이 그려진다. 철저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불현 듯 극적 관례를 깨며 파격적인 형상화를 구사한다. 역동적인 코러스, 쉴 새 없이 깔리는 배경 음악, 다중모니터 영상, 그리고 다채로운 조명 등의 사용으로 섬세하고 감각적인 장면들이 연출되는 것이다.  


작가의 글 - 최창남 목사
나는 사실과 진실보다는 이데올로기가 더 중요시 되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데올로기 앞에서 사실과 진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이러하고 진실은 저러하다 말해도 관심 기울이는 이들이 거의 없는 시대를 살아왔다. 경제발전을 이야기하며 독재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던 세력들은 그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조작하여 간첩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수십 년 감옥에 넣어 삶을 빼앗고 아예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하였다. 사람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람을 희생시켰다. 그 희생 중 하나가 바로 1974년 발생했던 '울릉도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냈던 이 사건을 통해 47명이 구속되었고 3명이 사형 당했다. 그리고 이들은 수십 년이 지난 후 서울고등법원에서 모두 간첩죄 등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생명과 삶의 대부분을 잃은 후였다. 그들의 삶은 어디에도 없다. 이미 사라져 버렸다. 책 '울릉도 1974'는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얽매어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연극 '상처꽃-울릉도 1974'는 이 책과 당시의 수많은 유사한 사건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아직 우리 시대에서는 진실은 낯설고 사실은 생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연극이 아직도 이념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이 암울한 시대에서 사람을 찾아 나서고, 낯선 진실과 사실에 귀 기울이는 작은 출발이 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연극이 울릉도 사건에 연루되어 삶을 빼앗겼던 모든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또한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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