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서동민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

clint 2025. 3. 24. 18:32

 

 

 

우악스러운 할머니와, 남편과 사별 후 자식에 집착하는 엄마, 
그들의 편애를 독차지하는 오빠까지 재수생 은빈에게 가족은 
고추 말리는 냄새 가득한 낡은 빌라처럼 쿰쿰하다. 
은빈은 지방대 치대에 붙어, 제 ‘오빠’ 규빈만 위하는 이 집안을 
영원히 탈출하려 한다. 열과 성을 다해 독립의 꿈을 키워가던 은빈은, 

어느 날 제 복숭아향 립스틱이 자꾸만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만 보니 머리가 나만큼 길고, 어려서부터 만화 세일러문을 좋아했던 

우리 오빠가 의심스럽다.그런 오빠 규빈은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은빈에게만 고백한다. 그리고 은빈은 택배를 받는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꾸미고 외출하는 일탈까지 규빈을 돕게 된다. 
또 은빈 자신의 인생을 양보할 수 없는데,  몰랐던 규빈의 아픔들이 보인다.
과연 은빈이는 지긋지긋한 가족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연극은 재개발을 앞둔 2010년의 서울 은평구의 연립주택에 사는 가족 구성원 각자가 품고 있는 서로 다른 욕망을 들춰낸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오빠의 커밍아웃을 막아야 하는 20살 재수생 은빈의 딜레마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윤리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퀴어 정체성을 가진 인물의 삶을 전통적 가족 서사 안에 녹여내는 이 작품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한다. 

 


추천의 글 - 극작가 안희철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은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이 제목이 도대체 뭐지? 뭘 의미하지?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제목이 지닌 단어의 의미 그대로 단순하게 접근해 보면, 말린 고추가 있고 립스틱이 있는데 그 립스틱이 복숭아향이 나는 제품이란 것이다. 당연히 그 둘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 둘이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것들은 작품의 주제나 소재 등과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작품의 제목은 작품의 인물, 소재, 주제, 구조, 양식, 사상 등 작품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 혹은 다수를 표현하여 그 작품을 상징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이 작품은 작품 제목이 작품의 이미지이기도 하고, 주인공의 특징을 담고 있기도 하며 상황이나 사건을 담고 있기도 하다. 또한 장소를 드러내기도 하고, 사물을 나타내기도 하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유머와 아이러니도 포함하고 있다. 작품 제목 하나만 따라가며 작품을 봐도 다양한 지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참 인상적이다. 
서울 외곽의 오래된 빌라, 80대 할머니가 널어놓은 말린 고추가 그 특유의 향을 풍기고 있는데, 그런 향과 충돌하는 다른 향, 복숭아향 립스틱도 그 빌라에 있다. 아들을 낳고 새끼줄에 고추를 매달아 놓는 풍습을 지켰을 법한 할머니는 사고로 아들을 잃고 장손에게 모든 걸 기대하며 살고 있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와 갈등을 안고 살지만,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시어머니와 별 다를 바 없는 어머니와 그런 두 사람의 기대를 받고 살아가는 아들은 군대를 다녀온 서울대 휴학생이다. 그리고 그런 아들 때문에 차별 받고 살아가는 딸은 하필이면 새로운 가족구성의 시작을 알린다고 할 수 있는 결혼식 예식장에서 알바 중이다. 가족 구성원의 나이나 학력, 직업 등을 철저히 계산된 설정으로 보이지만 자연스러 웠다. 이렇게 4인으로 구성된 가족의 모습만으로도 우리는 익숙한 한국의 가족 서사가 그려진다. 이 익숙한 가족사에 성적소수자 이야기가 더해져 있는데, 제목에 이미 그러한 내용이 숨겨져 있었다. 마 른 고추가 아니라 말린 고추라고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른 과일도 아닌 복숭아의 향이 나는 립스틱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한국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며 성적소수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거기에 더해 작가가 작의에서 밝힌 것처럼,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는 희곡을 읽고 공연을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따끈한 결말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그들이 어린 시절 함께하며 즐겼던 세일러문의 주제곡이 여러분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분명 어떤 울림을 느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살며시 너에게로 다가가 모든 걸 고백할 텐데" 물론, 그러한 고백만으로 모든 상황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소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같은 나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생각은 모두 같지 않다. 가족 구성원 내에서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솔직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꿈이 아니라서 솔직히 고백하지 못하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작가의 글 - 서동민
가족이란 참 신기한 존재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명목하에 누군가는 가족의 체모 한올까지 간섭하고, 누군가는 뻔뻔한 차별대우마저 정당화합니다. 이렇듯 한국의 가족 내에 자리 잡은 성역할의 강요와 젠더의 위계에 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한편으로는 사랑에 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시스젠더 여성과 트랜스젠더 여성이 서로 갈등하나 결국엔 손을 맞잡는 이이야기엔 한 친구를 향한 저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으니까요. 시린 20대의 한복판에 총여학생회실의 보일러를 켜둔 채, 그 친구는 제게 화장하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그 따끈함이 가장 폐쇄적인 가족과 사회에게까지 가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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