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치언 '다른 여름'

clint 2025. 1. 6. 10:15

 

 

5년 연속 전국대회 예선탈락,
문제아의 집합체로 불리는 대한고 핸드볼부는 해체되고 
부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해 여름, 학교 체육관에 원인 모를 불이 나고
방화범 용의자로 대한고 핸드볼부 '전설' 속 인물 고곽대가 지목된다. 
하지만 고곽대는 사고 당일 선명한 CCTV 속 영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화 사실을 부인하며 모든 이들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작열하는 여름, 불타오르듯 울어대는 매미 소리, 
7미터 페널티 드로우 라인 앞에 선 ‘그’는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 
'다른 여름'으로 갈 수 있을까?

 


  
고통만이 진실하고, 고통을 피하지 않는 자만이 고통을 지나갈 수 있다.
'이 여름'에서 '다른 여름'으로 가려는 시도, 
이것만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이 여름에 아직 못 들어온 사람, 이 여름에서 주저앉은 사람,
아주 오래된 여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이 여름을 지나 
다른 여름으로 향하는 사람. 이 여름 안에서 고통 받았지만 
우리는 이 여름을 극복하고 지나가야만 한다.

 

 

 

핸드볼 선수 고곽대가 체육관 방화사건의 범인일까?  <다른 여름>은 방화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은 고곽대와 사건을 조사하는 오덕구 형사, 정신과 의사, 청소년복지센터 상담사가 나오는 심리추리극이다. 나아가 고등학교 핸드볼 선수의 이야기를 통해 성장기의 고통과 외로움, 공포를 표현하고 있는 성장드라마이자 핸드볼 체육관에서 일어난 화재사건의 행적을 좇는 '스포츠 심리 추리극이다. 특히 시인 출신 최치언 극작·연출의 시적대사가 돋보인다. 핸드볼 경기 방식을 차용한 전개, 핸드볼 동작을 모티브로 한 움직임과 안무로 핸드볼 경기장이라고 체감할 수 있을 만큼 에너제틱한 무대를 선보인다. 

 



이 연극에 ‘스포츠 심리 추리극’이라는, 일견 너무 길어 보이는 타이틀이 달린 것은 절대 허세가 아니다. 핸드볼부가 해체된 그해 여름, 대한고 체육관에 불이 나기 때문이다. CCTV 속 영상에 선명히 비친 것은 분명 고곽대. 그러나 그는 자신이 3학년 고곽대가 아닌 2학년 ‘최고작’이라고 주장한다. ‘상상하지 않고선 나를 알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고곽대, 아니 최고작. 그는 누구이며 대체 체육관에 어떻게 불을 지핀 것인가?  ​오덕구 형사와 이수희 선생님은 번갈아 가며, 때로는 함께 최고작/고곽대/고곽대 선배/검은 새(놀랍게도 모두 한 인물이다)를 심문해 나간다. 격하게 움직이는 동선과 극으로 치닫는 인물 간 감정의 갈등은 환상적이다. 주인공의 정체를 추리하기 바쁜 와중에 ‘화재를 일으킬 만한 물질이 없었다’라는 국과수의 검사 결과까지 등장하며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불을 지필 게 없었는데 불이 났다니! 연극 내내 내 앞에 보이는 이 사람이 방화범인지 아닌지 땀을 쥐고 지켜봤다. 관객을 끌어가는 힘이 있는 연극이지만, 어두운 감정선과 빠르게 오가는 대사의 무게가 상당하다. 연극 내내 궁금했던 것은 바로 “고곽대는 도망치고 싶어 하는가?”였다. 고곽대는 자신이 최고작이라고, 실패의 경험 따위 없는 2학년 후배라고 주장한다. 그는 검은 새를 피해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서 쓰기도 하고, ‘고곽대 선배’라는 제3의 인물을 등장시켜 자신과 자신이 함께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고곽대는 자신을 부정하고 싶은 것인가? 그 부정으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가장 큰 두려움은 코트다. 코트 안에 처음 들어설 때부터 고곽대는 안 되는 것부터 배운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그렇게 한참 규칙을 배우다 보면 되는 것이 온다. 그다음으로 되는 것, 다음, 그다음. 끊임없이 다음으로 향하는 것이 선수의 삶이다. 그러나 고곽대는 그것이 두렵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 코트, 규칙, 선. 고곽대를 고곽대로부터 분리하는 것들이 그를 집어삼킨다. 검은 새의 탄생은 코트에서 시작한다. 
고곽대가 경기 시작 전의 자신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나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자아를 찾고 싶다고 부르짖는다. 고곽대가 최고작을 가장한 것처럼, 무너진 자신을 부정하고 원래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코트에서, 실패한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검은 새는 그런 고곽대를, 그리고 우리를 지적한다. 오줌싸개 찌질이 실패자 고곽대 선배도, 네가 두려워하여 비닐봉지를 쓰고 피해 다닌 검은 새도 전부 ‘너’라고 선언한다.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다른 여름’으로 갈 수 있다며 손을 내민다. 언제까지고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나의 실패를 외면할 수는 없다. 좌절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패한 나도, 좌절한 나도 전부 인정하고 포용해야만 그다음의 여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연극의 제목인 ‘다른 여름’이 성장한 고곽대가 맞이할 다음 해의 여름이라고 해석했다.  (박주은 연극 리뷰)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진영 '자목련 필 무렵'  (2) 2025.01.07
연우무대 공동구성 '판돌이 아리랑고개'  (2) 2025.01.06
최원석 '불멸의 여자'  (1) 2025.01.05
문진영 '마법의 샘'  (3) 2025.01.03
이철희 '진천사는 추천석'  (3) 2025.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