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령이 출몰한다는 나무 아래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햄릿.
소문만 무성하고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유령을 기다리는 햄릿은 정말 머리가 산만해지고,
마음이 복잡하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아버지의 유령이 소문처럼 나에게 복수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소문대로 아버지가 클로디어스 삼촌의 손에 독살되었을까?
앞으로 왕국의 왕위계승은 어떠한 수순을 밟게 될 것인가?
부정한 수단으로 권력을 잡은 클로디어스 삼촌과의 결투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러면 클로디어스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 거크루드에게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클로디어스 삼촌의 일등공신인 폴로니어스와 그의 딸이자,
사랑스러운 오필리어와의 관계는 또 어떡하고? 아, 머리 복잡하다....’
유령을 기다리는데 지루해진 햄릿은 소일거리 삼아 광대 호레이쇼와 함께
이러저러한 가능성들과 앞으로의 행동들을 다양하게 예측해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 아버지의 유령. 지친 햄릿이 깜빡 잠이 들면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고, 호레이쇼를 비롯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이 유령을
보았다고 떠들어댄다. 하지만 햄릿이 깨어있을 때면 유령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거트루드와 클로디어스 부부는 선왕이 자연사했음을 밝히고 사망진단서를 보여주는 등
결백함을 주장하고 오히려 햄릿을 걱정한다. 유령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린 듯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햄릿이 유령을 드디어 만나는데
유령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데......
극단 드림플레이에서 공연한 <유령을 기다리며>(김재엽 작, 연출)는 셰익스피어의 비극<햄릿〉의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를 차용하여, 베케트의 부조리 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전체 틀 속에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세계적인 명작 두 편 이외에 '해리 포터' 시리즈와 '스타워즈' 시리즈 등의 유명 영화 장면들을 솜씨 있게 패러디하며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초상을 재치 있게 그려냄으로써, 시종일관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시킬 수 있었다. 위트와 풍자를 동반한 웃음과 함께 필자를 사로잡은 점은, 세계적인 극작가와 그들의 명작을 합성함에 있어서 그 명성의 무게에 짓눌림 없이 21세기 형 한국판 햄릿을 용기 있게,그리고 발랄하게 그려낸 작가의 자신감이었다. <유령을 기다리며>에서는 먼저 극의 주인공 햄릿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낸 점을 주목해 볼만 하다. 작가 김재엽은 이 작품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복수를 결행하여야 할지를 고민하는 원작 햄릿과는 전혀 다른 햄릿을 창조해냈다. 자칫 김재엽 식 '햄릿'은 마법학교 열등생, 왕따, 동네북, 문제아로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지나친 단견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그의 진면목은 시종일관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극적 상황 속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극중에서 복수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복종하지도 못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그래서 그는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매일 기다리기만 하고 누군가 와서 자신의 인생을 바꿔주길 기다리고 정말 하고 싶은 게 없는 인물이다. 이런 햄릿의 모습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현대 젊은이의 모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동시대의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앉는 또래 젊은이들의 초상을 가감 없이 그려낸 것이다.
햄릿 이외에 그 주변의 여러 인물들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점도 주목할 만하다 햄릿의 영원한 파트너 호레이쇼를 궁정광대로 바꾸었다가, 다시 그를 잘못된 마법으로 똘똘한 강아지가 되게 만든 점도 기발하고 참신한 발상이다. 이 작품에서 '신뢰할 만한 친구의 전형 호레이쇼는 어릿광대 형 인물로 바뀌어, 선왕의 유령을 기다리는 햄릿 주변에서 그의 말동무이자 하인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강아지 호레이쇼의 존재는 어릿광대 강아지 이외에는 친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왕따인 햄릿의 처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함과 동시에, 기존의 주동인물/포일의 관계 혹은 주인/하인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기폭제로 활용된다. 그리하여 극중 사건의 절반 정도를 이끌어가는 어리벙벙한 햄릿과 영리한 강아지 호레이쇼의 관계는 꾀 많은 하인에 의해 극이 진행되는 희극적 전통의 활용으로 볼 수 있다. 그밖에 클로디어스로부터 시해를 당한 것이 아니기에 그에 대한 복수를 명령하지 않는 선왕, 왕위보다는 낭만적인 첫사랑과의 관계를 더 만족해하는 클로디어스, 그리고 선왕이 죽자 먼저 클로디어스에게 프로포즈한 거트루드 역시 원 작에 대한 흥미로운 과감한 해석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밖에 기존의 성격을 과감하게 파괴한 인물로는 교내 폭력 서클을 이끄는 사고뭉치 오필리어, 오필리어와 이란성 쌍둥이지만 그녀와는 영 딴판인 모범생 레어티즈, 유학 가서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도박에 빠진 오렌지족 유학생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망가진 모습들은 현대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그려내는 데에 일조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물의 파격적인 재해석은 희극적 전략으로서 기존의 고정된 관념을 뒤집은 결과로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형적인 역할과 성격의 도치와 함께 언어적 유희도 이 작품을 웃음으로 몰고 간 중요 요인이다. 이 작품에는 성적(性的}인 연상을 하게 하는 말장난과 계속적으로 말꼬리 잡기, 동문서답하기, 재치 있는 말대답 등 언어적 유회가 풍부하게 구사되었다. 이와 같은 언어적 재치와 함께 돋보이는 것은 오랜 기다림에 지친 햄릿의 꿈속에서 강박 관념처럼 다가오는 "넌 안 돼” 노래 장면 이다. 햄릿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가 함축된 내용이자 그에게 가해지는 강박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 작품의 분위기를 농축해낸 압권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품은 구성적 측면에서도 짜임새가 있다 극적 사건으로 햄릿의 기다림은 다양한 변주 속에서 개연성 있게 배치되었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서로 엇갈리고 마는 장면에 이어서, 하염없는 기다림 속의 예행연습 장면(그것도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처럼 두 가지 기능성을 각각 연습해 보는 장면!), 그리고 꿈속에서의 재회 장면으로 '기다림/ 만남'의 장면은 변화하면서 발전하였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성사된 만남을 통해 햄릿은 확실한 그 무엇을 얻고자 하나 실패로 끝나고 다시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또 다시 기다림에 빠져드는 결말로 극을 이끌어 갔다 이와 같은 사건 배치를 통해 결과적으로<고도를 기다리며>의 열린 결말과 맞닿아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무대의 유일한 세트인 나무(?)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키는 나무이자, 경우에 따라<햄릿〉 에서 유령이 나타나는 성벽으로, 그밖에 숨어서 엿보는 담이나 술래잡기를 하고 노는 놀이터로 전환되는 유연성을 발휘하며 사건 전개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유령을 기다리며>는 다소 경박하다고 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코드로 맞춰 놓고 보면, 가벼움도 그들의 중요 특질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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