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베데킨트 '판도라의 상자'

clint 2024. 11. 21. 06:53

 

 

남편을 살해한 범죄행위로 룰루는 9년형을 받는다.

게슈뷔츠는 상상을 초월하는 룰루의 구출작전을 세운다. 우선 간호사교육을 받는다.

만연하는 콜레라에 걸린 환자를 돌보는 일에 지원하여 죽은 환자의 속옷을 입는다.

다음날 형무소에 면회를 가서 주의가 산만한 틈을 타 룰루와 속옷을 바꿔 입는다.

두 사람은 모두 콜레라에 감염되어 병원의 격리병동으로 옮겨진다.

그곳에서 게슈뷔츠는 온갖 기술을 동원해 둘의 모습이 서로 식별이 되지 않도록 꾸민다.

완치되자 룰루가 게슈뷔츠 대신 퇴원한다. 룰루는 알봐와 함께 파리로 도망친다.

파리에서 룰루는 백작부인의 행세를 하며 산다. 이곳에서 온갖 사내들이 룰루를 괴롭힌다.

경찰끄나풀이며 윤락업자인 가스띠-삐아니는 카이로에 있는 유흥가에 룰루를 팔려 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살인자로 경찰에 넘기겠다고 협박한다.

로드리고 크봐스트도 돈을 주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덤벼든다.

주식폭락으로 룰루와 알봐는 알거지가 된다.

룰루는 쉬골흐에게 부탁해 로드리고를 처치한다.

쉬골흐는 그런 대가로 룰루에게 다시 접근한다.

가스띠-삐아니에 의해 룰루는 다시 쫓기는 몸이 되고 알봐와 런던으로 도망친다.

런던에서 쉬골흐와 함께 싸구려 지붕 밑 방에 살며 룰루는 길거리 여자가 된다.

게슈뷔츠가 룰루를 찾아와 처참한 생활에서 구하려든다.

알봐도 룰루를 보호하려다 손님의 칼에 맞아 죽는다.

결국 룰루는 변태살인자 잭의 손에 걸려든다.

잭은 게슈뷔츠를 죽이고 룰루를 칼로 난도질을 한다.

 

 

 

 

“베데킨트가 자신이 쓴 “검열”이라는 단막극 덕에 우리가 금서조치를 풀어줄 것이라 작가가 기대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퇴폐적인 범죄 행위','죄악의 미화', "관습과 예절을 지키기 위한 판매금지', 이러한 표현들이 베데킨트 작품에 내려진 비판이었고 작가는 살아있는 동안 검열관의 이런 판결 속에서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룰루- 비극만큼 작가 베데킨트 자신이나 작품에 대한 편견을 가져다 준 작품도 드물다. 베데킨트는 자연주의 연극을 '거짓'이라 규정하였다, 브레히트는 표현주의 연극을 '게거품 연극'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두 사람은 독일 현대연극의 태동을 위해 첫발을 내디딘 극작가이었다. 그 당시 연극계에서 소외되었던 베데킨트는 그래도 일부 젊은이들에게는 위대한 스승이요 우상이었다. 브레히트는 베데킨트를 '새로운 유럽의 위대한 스승'으로 냉소와 풍자로 인간의 모습을 높이 칭송한 위대한 작가로 우러러 보았다. 브레히트는 첫 번째 아들의 이름에 베데킨트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프랑크라는 베데킨트의 이름을 물려 붙여주었다. 1918년 3월 12일 신문에 베데킨트의 사망이 알려지자 브레히트는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분은 어는 곳을 가던 특유의 몸짓으로, 짧게 자른 머리와 쇳덩어리 같은 머리통을 살짝 숙인 채, 손을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고, 흉측하고 잔인하고 위험스럽기까지 보이는 분위기로 주위를 휘어잡았다. 그분은 귀신도 못 잡아간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사람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직접 보기 전에는 그분의 죽음을 받아드리기가 어려웠다.‘ 브레히트와 같이 많은 젊은이들이 베데킨트의 장래행렬을 뒤따랐다. 둘러 서있던 사람들은 붉은 장미를 던져주는가 하면 무덤가를 움켜잡으며 소리 질렀다. 선생님, 프랑크 베데킨트, 스승님, 저희들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은…등등. 이런 장례장면은 마치 베데킨트의 작품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였다.
19세기 말을 전후하여 기성 관습에서 탈피하고 여성의 역할을 바꾸어 보려는 여자 주인공들이 희곡 문학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파멸을 감수하더라도 남자들을 상대로 하여 여성의 정열을 쏟으며, 여성의 성해방을 주제로 한 이런 "숙명적 여성''이란 문학 장르에 속하는 주인공들 중에는 입센의 노라(Nora), 스트린트베리의 쥴리 양(Friiulein-Julie), 와일드의 살로메(Salome)등 이 있으며, 룰루(Lulu) 또한 이런 부류에 속한다.

 

 

 

원래 5막 괴기비극인 '룰루-悲劇'은 결국 "地靈”(序曲이 딸린 4막 비극)과 "판도라의 상자" (3막 비극)의 2부작이 되었다. “지령"은 발표되자마자 공연되어 베데킨트와 부인 털리(Tilly)가 직접 주인공을 맡는 등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판도라의 상자”는 발표되자마자 "비도덕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며 베데킨트는 몇 년에 걸친 소송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재판과정에서 "판도라”는 예술성에 있어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그 당시 시민사회가 타부시해오던 윤락이나 혼란스런 성적 묘사 등은 부도덕한 것으로 공연은 물론 출판물 배포 금지되는 수모를 당했다. 베데킨트는 타부 시 되는 性문화의 비판자로서, 성혁명의 선구자로서, 20세기를 맞으며 일어난 새로운 연극의 길잡이로 인정받으며,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독일연극은 예외없이 시민사회의 갈등만이 묘사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베데킨트가 없었다면 독일연극은 지루했을 것이다.' 라고쯔-봐이크(Stefan-Zweig)는 말한바 있다. 오늘날 룰루-비극을 어떻게 받아드리는가, 베데킨트의 성적인 혼란이나 부도덕한 언어 속에는 시대 비판적인 강한 진실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1920년 페히터(P. Fechter)는 베데킨트를 가장 처절하게 性을 반대한 작가로 규정하고 있다. 베데킨트는 타부 시 되던 성을 보편화 시키려고 노력한 작가로 라쉬(W. Rasch)는 평가하면서, 시민사회의 억압으로 도덕관이 삐뚤어져 버렸으며 그와 같은 사회현실 속에서는 성의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베데킨트의 작품이 제시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베데킨트는 비극적인 처절한 상황 그 자체를 묘사하려기보다는 그런 처절함을 불러드린 상황을 바꾸어 보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인간은 욕망에 사로잡힌 꼭두각시와 같으며 시민사회의 거짓 도덕관으로서 비판한다. 베데킨트만큼 인문, 문화사적으로 등한시 당한 독일의 "현대 고전작가”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판도라의 상자"이다. 미술관에 자주 들르던 베데킨트는 흔히 미술품의 소재로 등장하는 '판도라'를 1894년 경 룰루-비극의 주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18세기 중엽부터 최신유행에 따른 불란서 의상과 머리모양을 한 '판도라'라는 사람크기의 인형이 크게 유행하였고. 영국 등 여러 나라로 수출도 되었다 (나폴레옹은 1804년 판도라 인형의 영국수출을 금하기도 했다). 연극의상을 직접 디자인 하는 등 의상에 남다른 관심과 조예가 깊었던 베데킨트가 널리 유행하던 이 '판도라 인형'에 무관심했을 리는 없다. 희랍 신화를 보면 판도라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를 벌하기 위해 제우스가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만든 여인이다. 아름다운 판도라는 세상의 온갖 악을 담고 있는 상자를 가지고 헤르메스의 인도를 받으며 인간세상으로 내려온다. 미리(pro) 생각할(metheus)수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나중(epi)에야 생각이(metheus) 미치는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열도록 하여 상자 속에 들어있던 온갖 악이 빠져나가 온 세상에 퍼지고 만다. 늦게나마 뚜껑을 닫자 다행히 희망은 빠져 나가지 않아 인간은 그나마 희망만은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원래 판도라라는 이름은 '모든 것을 내주는 여인'이란 뜻으로 대지의 여신 가이야(Gaia)로도 불린다. 이와는 달리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가 흙과 물로 빚어 만든 다음 불로 생명을 넣어준 최초의 여인으로 프로메테우스의 아내가 된다. 이로써 판도라는 최조의 인간 데우칼리온(Deukalion)을 낳는다. 판도라 신화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전되는 인간사회의 변화과정에 따라 그 유형이 바뀐다. 즉 원래 '모든 것을 부여하는' 생식의 여신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는 남성 神인 제우스의 판도라로 바뀐 셈이다.
헤시오드(Hesiod)의 판도라는 항아리를 가지고 왔으나 점차 상자로 바뀌었다. 중세기 이후에는 상자란 여자의 성기를 상징한다. 희망이 상자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림(Grimm)사전에 의하면 여자의 임신을 상징한다.

 

 

 

 

 

작가의 글
나는 다음의 드라마를 1892년부터 1901년까지 9년 간 작업했다. 그 이후에도 지금 형태의 최종본이 나오기까지 매번 새로 판을 찍을 때마다 계속해서 철저한 수정작업했다. 재판부의 파기처분 판결이 내려졌던 1906년 내가 그 책에 썼던 말들을 여기 싣고자한다.
이 드라마를 비윤리적이고 비예술적인 저질작품이라고 고소가 일어나자, 모두 세 번의 심급기관의 판결이 내려졌는데, 바로 거기서 작품의 윤리적이고 예술적인 면이 인정되었다. 심급기관이란: 베를린 궁정1심 지방법원, 라이프치히 고등법원, 그리고 베를린 궁정 2심 지방법원이었다. 1심 지방법원은 그와 같이 인정하여 그 근거 하에 피고의 무죄판결과 책의 해금판결에 이르게 되었다. 고등법원은 윤리적이고 예술적인 질만 가지고 한 저작물에서 음란성의 성격을 규정하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입장을 취했고, 이러한 견해에 따라 첫 번째 판결을 기각시켰다. 2심 지방법원은 고등법원의 견해를 따라 피고는 무죄인 반면에, 발표된 형식의 책은 파기하도록 판결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때까지 공개적인 토론에서 논의되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품의 윤리적이고 예술적인 면에는 훨씬 세심한 가치를 부여했다. 이 글의 목적은 그와 같은 윤리적이고 예술적인이 책의 질을 지키면서, 모든 불순물들을 깨끗하게 제거하려는데 있다. 처음에 쉽지 않은 소재를 다룸에 있어 예술적인 자부심과 창작의 즐거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불순물들 말이다. 20명의 독일재판관들, 즉 진지하고 노련한 그 사람들이 작품 속에 들어있다고 인정한 중요한 부분들을 감추거나 숨겨야 하는 책임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몇 마디의 간결하고, 순전히 객관적인 소견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재판관들은 오인하고 있지만 이 작품의 비극적 주인공은 룰루가 아니라 게슈뷔츠 백작부인이다. 룰루는 몇 가지 술책을 벌이는 것을 제외하면 3막 내내 순전히 수동적인 역할을 한다. 이와는 반대로 게슈뷔츠 백작부인은 1막에서 소위, 이렇게 과장해서 말해도 되겠지만, 초인적인 자기희생이란 하나의 틀을 보여준다. 2막에서 이야기가 진전되면서 백작부인은 '비정상 성'이란 자신에게 내려진 무서운 운명을 온갖 정신력으로 이겨낸다. 그 다음 3막에서 모든 욕망을 버리고 끔찍한 정신적인 고통을 견뎌낸 다음, 친구의 변호인으로서 희생적인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 인물에게 부가된 비정상 성이란 기괴한 운명을 진지한 극적 형상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것을, 이 작품에 내려진 세 번의 판결 중 어디에서도 위법이라고 밝히고 있지 않다. 실제로 고대 희랍비극에서도 주인공들은 거의가 정상 성을 벗어나 있다. 이들은 탄탈로스 家의 후손들로서, 신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이들의 이마에 둘러 씌웠다. 다시 말해,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지고의 인간적 행운을 되찾기 위해 처절하기만한 정신적 변화 과정을 겼었지만 이들에게 휘몰아쳐 내려오는 불행한 저주의 유산을 떨쳐내지는 못한다. 이들은 인간 공동체를 위해서 아무 쓸모도 없이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비참하게 자신들의 운명에 몰락하고 만다. 관객들 가슴에는 이와 같은 비정상 성보다 더 끔찍하게 각인되어 박힐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공연을 보면서 관객이 예술적인 기쁨은 물론 꾸밈없이 영적인 소득을 얻게 된다면, 이런 공연은 도덕의 영역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려주는 셈이다.
그렇지만 '비정상성의 저주' 라는 매력 하나만의 이유로 내가 그것을 비극의 대상으로 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문화에 나타나는 것처럼 아직도 이 같은 운명이 비극으로 다루어진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말할 수 없이 엄청나지만 너무나 의미 없는 영혼의 투쟁이라는 인간의 비극을 우스꽝스러운 운명에서 구해내고 그와 직접 관련 없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온정을 불러내려는 충동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로, 무지한 인간이 이 비극을 위해 마련한 저속한 조롱과 날카로운 조소를 가능한 한 인상 깊게 형상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목적을 위해 나는 로드리고 크봐스트라는 힘센 인물을 만들어내었다. 로드리고 크봐스트는 게슈뷔츠 백작부인과 대립되는 역이다. 작업을 해나가면서 나는 이 힘센 인간의 우스꽝스러움을 잔인하게 형상화하면 할수록 게슈뷔츠 백작부인이 불행을 통해 겪는 영혼의 변화과정이 도덕적인 관점에서 점점 더 고양된다는 것을 분명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게슈뷔츠 백작부인의 운명을 진지하게 다룸으로서 그 우스꽝스러움이 점점 더 힘을 잃고 압도당한다는 것과, 작품이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결국 비극적 진지함이 반드시 설득력 있는 승자로 전투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이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음을 모든 공연들이 입증해 주었다. 하지만 원래 형태의 드라마에 대해 내려졌던 판결 또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고등법원의 판결과 그와 더불어 베를린에 있는 궁정 지방법원 2심 판결은 하지만 이 비극이 의도했던 이런 인상이 '일반적인 독자'에게서도 일어난다는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꼭 그래야 되는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 무지한사람은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독자'의 한 사람으로 직접 이 드라마에 곡예사로 등장하지만, 이 사람의 조소적인 우스꽝스러움은 작품의 경향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풍자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지만 독서를 통해서만 그런 풍자효과를 느끼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런 인물을 조소적이고 경멸적으로 보는가를 알았을 때야 비로소 놀랍게도 풍자 성이 갖는 효과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이 곡예사의 입에 담아 놓은 저질성은 팔슈타프, 메피스토 혹은 슈퍼겔베르크 (팔슈타프(Falstaff)는 셰익스피어. '헨리 4세"에 나오는 떠버리. 메피스토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슈피겔베르크는 실러의 "군도”에 등장한다.)와 같은 인물들의 그런 것과 전혀 비교도 안 된다.
이 드라마를 원래 형태로 출판했을 때, 아주 높은 인간적 윤리성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확신이 내 마음속깊이 차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윤리성을 저촉한 흑은 음란서적의 유포라는 명분으로 나를 고소하리란 것도 내게는 기정사실이었다. 예상했던 결과가 일어났던 것은 내 확신의 옳고 그름에 대한입증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어떤 정신적 분야에서 단호한 걸음을 내딛는 사람은 바로 그 분야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재판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정신적 발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사가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그 때까지 시술되지 않은 절제술을 시도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육체의 훼손이나 혹은 과실치사로 고소될 위험에 처하게 됨은 자명하다. 경험에 따르면 이런 모든 분야는 극단 적인 결과로 귀착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겉으로 나타난 친숙한 외부현상 때문에 강한 반대요소와 대치되는 것이다. 즉 치료제와 독약은 어떻게 쓰느냐 하는 그 사용방법에 따라서 구분이 되는 법인데 말이다. 어떤 것이고 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이지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확실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드물다. 진정으로 고귀한 것이 처음에는 거의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관심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상하게 받아들였던 많은 행태들이 한순간에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나 지 않았던가! '최고의 정당함이란 최고의 부당함'(키케로의 '의무에 관하여"(De officus)에 나오는 말. 최악의 범죄(살인)는 바로 최악의 정의(독재살인) 일 수 있다고 베데킨트는 비유하며 재판의 부당함을 역설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이란 개념은 이 어떤 시대가 끝나던 결국 맞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이러한 사고과정 속에서 위에 언급한 사실들을 위해 2천 년 동안이나 확립해놓았던 규범, 그 가치가 아마도 영원히 유지하게 될 그런 규범이 예루살렘의 공회 (Synedrium.산헤드린)에 의해서 신성모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기독교 창시자(예수)의 운명이기도 한 것이다. 복음서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때 공회는 오랜 망설임과 심한 주저 속에 결국 그 사건을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유태교 지성소 앞뜰에서 행한 '성전을 부수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의 도전과 같은 비유를 하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판 직을 맡은 공회가 오늘날의 어떤 판사도 능가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행사했음을 복음서는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경우에는 항상 심판받아야 되는 불운이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운보다 덜 비참한 것으로 남는다.
나의 작품에 대해 내린 판결에 관한사건을 규범이라고 일컫는 마지막 이유는 재판관이 비호하는 시민적 도덕과 지상적인 합법성을 벗어나는 인간적 도덕 사이의 차이 때문이다. 모두 세 번에 걸친 드라마에 대한 판결 에서 매춘은 두말없이 비윤리성으로, 그런 행위는 음란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더할 나위 없이 시민사회의 도덕성으로 본다면 전적으로 적합한 것이다. 하지만 쿠드라카 왕(흙으로 만든 수레”)으로 부터 괴테 ("신과 印度 사원의 무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에 걸쳐 존경할 만한 작가들은 일반적인 경멸을 뒤로하고 매춘의 불행한 희생자를 보호할 소명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성직자들과 재판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태복음. 21장31절).
예수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면 이보다 더 논리적이고 더 일관성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부유한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고하고 짐진자들을 위해,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들을 위해서,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 하늘나라를 건설하기 때문이다. '성전 모독자' 에 대해 행해진 재판과정이 실제로 행해졌음과 더불어 이 같은 발언은, 예수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후세에 교회장로들이 지어낸 경건한 이야기들에 불과한 기록이라는 오늘날 성서연구의 주장을 뒤집는 아주 결정적인 증거로 나는 본다. 어떤 성직자가 설교단위에서일망정 이 같은 발언을 하려고 감히 시도한 적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수고하고 병든 자, 죄진 자들이 시민사회의 도덕성속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찾을 것이라고 재판관이 내게 묻고 있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문화는 그 때문에 비참하게 몰락하는 것은 아닌가? - 그 같은 물음에 대해 나는 모든 우려를 불식시키는 분명한 대답을 해줄 수 있다; 인간적 도덕이 시민사회의 도덕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 있으려 한다면, 인간적 도덕은 세계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보다 심오하고, 포괄적인 지식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사명도 받지 않고, 재판관 앞에 선 예수그리스도의 이 같은 발언들을 변호해야할 의무는 없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자리에 된에서 칼 크라우스(Kraus)가 행사를 주관 했던 멋지고, 나에겐 잊을 수 없는 공연의 프로그램을 싣는다.」 칼 크라우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