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강백 '봄날'

clint 2024. 10. 7. 13:11

 

 


칠형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항아리에 돈을 담아 구들장 속에 감추는

인색한 아버지를 원망한다. 장남은 불평불만이 끊이질 않는 동생들을 위로하며

어머니처럼 보살핀다. 장남은 천식으로 건강이 약한 막내를 극진히 간호한다.

겨울동안 눈이 안 녹아 식량이 떨어진 백운사 스님들은 칠형제의 집으로 찾아와

시주하라고 하다가 오고 갈곳 없는 동녀를 맡기고 돌아간다.
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힘이 없는 것은 뱃속에 회충이 있기 때문이라며

배고파하는 그들에게 회충약만 먹여 일을 내보낸다.

아들들은 허기 때문에 세상이 다 노랗게 보인다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무당에게 엿들은 풍월로 젊은 여인을 안고 자면 몸이 젊어진다는 말을 믿고

동녀를 방으로 들인다.
아버지는 무당에게 젊어지는 비결을 알아오겠다며 장남을 데리고 길을 떠난다.

아들들은 자기들의 집에 사는 구렁이를 때려 잡자고 하지만 번번이 말로만 그친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외출한 사이 동녀를 방에서 끌어내어 심하게 놀린다.

막내는 동녀를 위로해주고 두 사람은 연민을 느낀다. 장남은 무당에게 다녀오는 길에

아버지를 설득해서 아들들에게 땅을 나눠줄 것을 약속받는다.
무당집에 다녀온 아버지에게 아들들은 미리 준비해 놓은 회춘에 좋다는

구렁이 삶은 물과 주름살을 펴는데 쓰는 송진을 바친다.

아버지가 송진을 바르고 눈을 못 뜨는 사이에

아들들은 구들장을 뜯고 항아리 속의 돈을 가지고 도망간다.

집에 남겨진 막내와 동녀는 결혼하고 장남은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

집나간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온다.

 

 

 

 

(작가의 말)//이강백(李康白) '봄날'과 삶의 과정들----

<봄날>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쳐가는 과정들, 즉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무대위에 표현해 보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등장인물들 역시 노년기의 아버지, 장년기의 장남, 청년기의 자식들, 소년기의 막내와 동녀(童女)로 구성하였다. 그러한 인간의 삶의 과정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갈등과 대립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노년기와 소년기의 갈등은 마치 겨울과 봄 같다고 할 수 있다. 겨울이 모든 소유물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인색한 모습이라면 봄은 그 정반대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싶어 안달하는 조급한 모습이다. <봄날>을 쓰면서 고심했던 것은 가급적 갈등과 대립을 눈에 띄지 않게 눌러 두는 일이었다. 아지랑이처럼, 엷은 봄안개처럼, 꽃가루 때문에 천식을 앓는 것처럼, 그렇게 속으로만 감춰지도록 하고 싶었다. 그리고 밖으로 드러나는 한 막내 어린 동녀를 통해서, 오히려 그 갈등은 모성애적(母性愛的)인 장남이라든가 병약대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전과정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장남이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꽃이 활짝 핀 갈마재 고개에서 훌쩍훌쩍 뛰는 장면이라든가, 막내와 동녀가 마당에서 주고받는 대사들은 그러한 인간에 대한 긍정을 아름답게 묘사해 보고자 애쓴 흔적들이다.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특징을 빌렸던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다.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에서, 혹은 옛날의 신화(神話)에서 계절의 특징이나 상징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흔히 본다. 또 최근의 시(詩)라든가 노래에도 그러한 예가 흔히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봄'은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봄이 갖고 있는 대립과 조화의 기능이 다른 계절에 비하여 월등히 두드러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봄날>은 시, 소설, 음악, 영화, 그림 등 온갖 예술 분야가 표현한 봄의 이미지들을 대폭적으로 도입해 보았다. 만약 그러한 시도가 연극형식의 폭을 넓히는데 작은 도움이 되고, 관객들에게도 새롭게 받아들여진다면 나에게는 다시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봄날>은 권오일 선생님의 격려가 없었던들 쓰지 못했던 작품이다. 작품의 구상때부터 탈고까지, 그리고 고쳐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봄날>의 공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성좌'의 배우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 어느 해 여름보다 무더웠던 금년 여름에<봄날>을 연습하면서 땀을 흘린 그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공연 포스터 한 장을 붙이기에도 어려운 연극환경에서, 희곡을 쓰는 사람의 노고가 가장 적은 것 같아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강백의 최고작품을 꼽으라면 난 단연코 '봄날'이다.

이강백의 여러 작품 중 알레고리를 벗어나 완숙함에 눈을 떴다는 바로 그 작품이다.

<봄날>은 1984년 봄에 창작되어 극단 성좌가 같은 해 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권오일 연출, 오현경, 박웅, 이승철 등 출연)하여  

이 작품으로 제8회 대한민국연극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희곡의 형식은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극동아시아, 시베리아, 우랄산맥 너머까지 퍼져있는 동녀풍속(童女風俗)을 중심으로 엮어가는 줄거리와, 다른 하나는 그 줄거리의 장면과 장면사이에 봄에 대한 노래, 그림, 영화, 연주, 시조, 신문, 약전, 편지 등을 삽입시킴으로써 그 두가지의 구조가 서로 결합 또는 이완되도록 짜여져있다. 이것은 동녀풍속이 갖고 있는 설화적 요소를 좀 더 실제적으로 가깝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겨울을 간신히 견뎌낸 늙은 아비는 회춘하기 위해 어린 동녀(童女)를 품에안고 그 뜨거운 체온을 옮겨받고, 혈기왕성한 젊은 자식들은 훨훨 타오르는 산불을 바라보며 봄 밤을 지샌다. 쫓겨난 어미대신 자식들을 길러낸 장남은 헌신적인 모성애로써 아비와 자식의 갈등을 감싸고 꽃가루 날리는 봄철엔 천식을 앓는 병약한 막내는 피를 토하며 동녀를 그리워한다. 작품<봄날>은 늙음과 젊음, 죽음과 생명, 겨울과 봄이 빚어나갈 갈등과 화해를 아름답게 그려놓은 작품이다. 봄날, 겨울잠에서 깨어난 온갖 짐승들의 암컷, 수컷들이 모여서 몸을 섞고, 햇빛과 바람과 나무는 서로 부벼대며 산불을 일으킨다.<봄날>의 등장인물들은 인간이 거쳐야하는 과정들, 유년기와 청년기와 노년기를 원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지랭이 가물거리는 나른한 봄날 후미진 산마을에 늙은 홀아비와 일곱 명의 아들들이 밭을 갈며 살고 있다. 절대 권력자로서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자상한 장남, 천식을 앓는 병약한 막내,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혹사당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다섯 명의 자식들이 불평한 관계 속에서 어렵사리 생을 영위하고 있다. 어느 봄날 산불이 나자 절간의 스님들이 주워 길렀던 동녀(童女)를 이 집에 맡기고 사라져 버린다. 늙은 홀아비가 젊어지기 위하여 이 동녀를 품고 잔다. 동녀를 사모하는 막내는 피를 토하며 애통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다 못한 다섯 명의 자식들이 마침내 반기를 들고 농토의 분배를 요구하지만 욕심많은 아버지가 들어줄 리 만무이다. 참다 못한 자식들이 꾀를 써서 아버지 얼굴에 송진을 발라 눈을 못 뜨게 한 다은 항아리속에 묻어둔 아버지의 돈을 나누어 가지고 도망쳐 버린다. 봄이 가고 여름이왔다. 동녀는 막내의 지어미가 되어 아기를 배게 되고 아버지는 떠나간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허망된 탐욕에 사로잡혔던 지난 날을 탄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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