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기우 '가인 박동화'

clint 2024. 7. 18. 05:45

 

 

 

<가인 박동화>는 전북 지역 연극인들이 한데 힘을 모은 의미 깊은 작품이다. 

희곡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박동화. 그에게는 '전북 연극의 산파' 

'전북연극의 개척자'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해방 이후 전북의 현대연극사에서 

그는 가장 크고 명확한 족적을 남겼으며, 그 자취는 신화와 같이 여겨지기 때문. 

그를 만난 적도, 그의 작품을 본 적도 없었을 지금의 후배 연극인에게도 그는 

이어 받아야할 정신과, 뛰어 넘 어야할 벽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전북연극, 그리고 그 시대 감성 한자락을 분명 보여주며,

사후 전북연극의 흐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동화를 보다 정확하고

차근히 바라보는 일, 그리고 작품을 통해 그를 이해하고 그를 평가하는 일은

바로 이런 이유로 더욱 절실해진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절, 박동화의 일상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분명 큰 자취를 남기고도 소문만 무 성할 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곧 잊힐지도 모를 역사 속 인물일 뿐이다. 

 

 


전북연극협회가 그의 추모 28주기를 기해 기획·제작한 이 작품은

올곧게 연극만을 위해 희생한 박동화의 삶과 예술세계를 그린 것으로,

그가 발 표한 작품들의 사상적 성숙기인 1930~50년대 활동이 중점적으로 다룬다.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양면성 · 부조리성에 대한 풍자가 중심을

이루는 그의 작품 기저가 그 시대에 형성된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작품을 통해 그의 삶과 내면세계를,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이었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질곡의 한국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으며, 박동화라는 개인의 일대기에

숨겨져 있던 파란만장한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 또 다른 이야기인 비주류 연극인들의

애틋한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연극은 오늘을 사는 예술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한 연극인의 목소리다. 죽음에 임박한 시간, 박동화는 후배이자 제자인 문치상

전 전북연극협 회장에게 무대에서 살다 무대에서 죽는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며,

후배들을 부탁했다고 한다.

"나는 행복한 게야. 연극인이 무대에서 살다 무대에서 죽은 것 아닌가. 후회는 없네. 다만 연극을 맘 편히 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만들어 주고 싶 었는데... 자네는 후배들을 위해 길 닦음 노릇만 해. 먹고살지 못하니까 쓸만하면 다 서울로, 서울로 떠나지 않는가? 그들이 이 고장을 지킬 수 있 도록 도립극단이나 시립극단도 만들고, 소극장도 있어야 돼. 참 나 말이야 죽거든 절대 화장하지 못하게 하게나? 난 죽어서도 연극을 해야 되니까."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동화(1911-1978)는 전북 현대 연극의 개척자로 불린다. 전남 영암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극예술연구회·실험무대·조선연극협회·중앙무대 등에서 활동했으며, 일제에 저항했던 이력으로 1942년 옥고를 치렀다. 1959년 국립극장 희곡공모에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당선돼 본격적인 극작가의 길을 걸었으며, 1961년 전주에서 극단 창작극회를 창단한 이후 20여 년 동안 40여 편의 작품을 창작·연출했다. 목포호남평론·군산민보·전북대신문사 등에 근무하며 시·소설·수필·평론·희곡 등 다양한 글을 썼다. 전북예총회장과 전북연극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유고집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와 "창문을 닫아라" 등이 있다.

 

 

 

그는 이미 1931년부터 서항석·이광래 등 많은 연극인들과 교류하며 연극무대를 경험했고, <극예술연구회>·<실험무대> 등과 인연을 맺으며 신극운동에 동참했다. 이 시기 연극배우로 1980년대까지 활동했던 고설봉(1913-2001)은 이 무렵의 박동화를 ‘연극 친구들과 같이 다니며 희곡작품을 쓰던 인텔리’로 기억했다.
그 당시 연극계는 극장 부족, 제작 부실, 창작극 부족, 배우 부족 등 내적 어려움에 일제의 검열 강화라는 외부 압력의 진통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였다가 1931년 7월 동경유학생 출신인 서항석 등 해외유학파가 중심이 돼 본격적인 신극 단체인 <극예술연구회>를 구성해 심기일전하던 때였다. <극예술연구회>는 1932년 직속극단인 <실험무대>를 두고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면서 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6년 봄, 박동화는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다. 이곳에서 그는 <동경학생예술좌>와 인연을 맺고 극작과 연출 실무경력을 쌓는다. 자연스럽게 신극운동에 빠져들었던 그는 문학을 선호했기에 연기보다 희곡 공부를 시작했다. 곧 귀국한 그는 <조선연극협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10월 24일과 25일 부민관 무대에 오른 모리엘 작 「수전노」에 처녀 출연한다. 출연 동기를 오장환 시인의 권유 때문이라고 했다. 이화삼·박학·이백·윤북양·강양양·유랑 등과 함께 「수전노」 무대에 오른 그는 라푸레슈 역으로 출연했으며, 본명인 박덕상 대신 ‘박동화’란 이름을 처음 사용한다.
1937년 박동화는 목포로 내려가 전국 유일의 한글잡지인 『호남평론』을 내던 잡지사에서 근무했다.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부모의 간절한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미 1936년과 1937년 『호남평론』에 소설 「동냥개」와 희곡 「수해 후」 등 시·소설·희곡·수필·평론 등을 발표하곤 했는데, 1937년 첫 희곡 「수해 후」를 발표하면서 소설이나 수필을 발표할 때와 달리 박동화란 이름을 사용했다. 1928년 광주학생의거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퇴학당했던 일과 1942년 ‘불량선인’이라 칭해지며 희곡과 일기 등을 압수당하고 수감생활을 했던 일이 그렇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1942년 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일본 순사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이유 역시 그때의 이력이 발단이었다. 그러나 1942년 봄, 박동화는 사상극을 썼다는 이유로 좌익으로 몰리고,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던 과거와 『호남평론』에 글을 쓴 이력 때문에 일본경찰에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일기와 문예 작품들은 일본 경찰에 압수당했고, 혹독한 고문과 연극 활동 탄압은 그에게 일제에 대한 치가 떨리는 증오심을 갖게 했다. 더불어 친일세력에게 증오의 눈길을 버리지 않고 살 수 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다.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박동화는 김소선과 함께 신의주로 떠난다. 배화여고를 갓 졸업한 김소선은 연극인 박동화를 공연장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엄격한 집안의 극렬한 반대에도 13세 연상인 그를 따라 과감히 신의주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떠났다. 그녀는 이후 평생 박동화를 그림자처럼 지켜보며 헌신적으로 내조하는 아내가 되었다.  6.25 동란 후, 박동화는 1956년 전북대학교 대학신문 편집국장으로 오면서 전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64년 극단 <창작극회>를 탄생시켰다. 창단멤버는 대부분 극예술연구회출신 졸업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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