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지영 '90-7번지'

clint 2024. 7. 12. 15:03

 

 

 

10년 만에 영진은 엄마 학순을 찾아왔다. 
엄마는 영진이 어릴 적 아버지에게 쫓겨났다. 
하늘하늘 원피스에 양산을 쓰고 보험 판매를 다녔던 여자에게 
아이들과 살림을 모두 뺏기고 말았다. 
그 후로 학순은 시집을 다섯 번이나 갔다. 
마지막 남편 영배를 만나 딸린 자식 여섯을 키우고 살림을 늘렸다. 
나이 칠십에 치매 걸린 남편 영배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살지만 
남편 영배의 자식들에게 하루아침에 쫓겨날 판이다.
영진은 엄마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애원하지만,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던 학순은 
갑자기 딸 영진을 찾아온다. 
영진에겐 이제 2살 된 늦둥이 딸이 있었다. 
대학을 나왔으나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하는 영진의 딸 송림은 
몸이 아프다. 설상가상 영진의 남편 공장에 불이 나고 영진은 집을 
팔아야 할 상황에 처한다. 이제 학순도, 영진도, 송림도, 두 살배기 딸까지 
네 여자의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4대 째 증조모부터 증손녀 까지... 이들은 어떨게 될까?

 

 



숨이 턱턱 막혀 온다. 불행은 학순에게서 딸 영진에게로, 

그리고 다시 영진의 딸 송림에게 대물림하듯 이어진다. 

그래도 관객에게 삶의 희망을 줘야 할 연극적 사명이 있지. 

이렇게 이들의 운명을 땅을 뚫고 지하로, 지하로 꺼져가게 할 작정인가? 

도무지 솟아날 구멍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한없이 무기력하다. 

연극 ‘90-7번지’는 독특한 대사 형식을 취한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소설을 읽어가듯 ‘~~ 다’로 끝나는 

독백체로 대사를 이어간다. 상대방이 듣거나 말거나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소통이 되는 듯하다가도 다시 자신만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단절된 대화는 순간순간 연결되고 

연결된 대화 속에서 이들은 서툰 마음을 나눈다.
이제 곧 허물어져 재개발 되는 ‘90-7번지’에 학순과 영배의 집은 없다. 

그들의 고단했던 삶의 흔적들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질긴 운명의 끈이 끊어져 영진의 삶도, 영진의 딸 송림의 삶도 

제발 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이들 여자들의 이야기는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인 한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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