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종망치’(脅從罔治). 요즘 시대에 이렇게 어려운 제목의 연극이 있을까?
“위협에 의해 따른 자는 처벌하지 말지어다”라는 뜻의 ‘협종망치’는 중국 고전 서경(書經)에 나오는 한 구절. 시대와 권력의 급변 속에서도 구세력의 밑에 있던 자들을 현명하게 구별해 용서와 처벌을 해야 한다는 지혜가 담긴 말이다.
창작극 ‘협종망치’는 지난 시절 권력의 하수인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를 과연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를 되새겨보게 하는 작품. 작품의 모티브는 1986년 6월 부천경찰서에서 벌어진 성고문사건이다. 이 연극은 정치극이자 여성극이다. 암울했던 시절 권력 앞에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최악의 모욕과 폭행을 당했던 권여사. 그는 세월이 흐른 후 국회의원 당선을 눈앞에 둔 고문경찰관 문근형의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두 발의 총알이 장전된 권총을 그에게 건네준다. 그에게 권여사 자신을 쏠 것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인지, 둘다 함께 죽을 것인지 선택하게 하는 것.
작가는 ‘산씻김’ ‘불가불가’ ‘0.917’ 등의 화제작을 집필했던 이현화. 그는 “지난 역사의 치부를 수술하듯 도려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말한다. 그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위협이 없었는데도 자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용서하지 말지어다”인 것으로 보인다.
이 현화 작 〈협종망치(脅從罔治)>는 '우두머리는 모두 죽이되, 위협에 쫓은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 (脅從罔治)' 는 서경(書經)의 문장 일부를 제목으로 하는 데 과거 수십 년간 지속된 우리의 어두운 정치 현실을 배경으로 새로운 시대를 향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에 대한 조언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즉 문 근형 이라는 과거 정권의 하수인으로 고문을 일삼았던 인사가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승승장구하여 이제 국회의원 당선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과거 그에게 고문을 받고 조작된 정부 전복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하고 나온 권 선희라는 여자가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 남자가 중요한 순간 찾아가는 내연의 여인 집에 잠입하여 뜻대로 그 남자를 포박하는 데까지 성공하지만. 권총의 발사를 남자에게 맡긴 채 어둠 속에 한 발의 총소리만 들려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이 사람에 대한 처벌이 과연 합당 한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시끌벅적한 국회의원 선거 사무실과 내연의 여인을 숨겨 둔 은밀한 아파트를 대비시키고. 전자를 어쨌든 현실은 존재하고 또한 흘러간다는 상징으로서.... 후자를 음습한 과거의 재현 공간으로서 활용하는 동시에 그 처리 방향을 묻는 공간, 즉 미래지향적 공간으로 활용한 기법이 눈에 띠는 작품이다.
한 아기씨의 오피스텔에 불쑥 낯선 여인이 찾아와 위협을 가하면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초기작인 <쉬-쉬-쉬-잇>의 변주로 읽힌다. 그러나<쉬-쉬-쉬-잇>이 우리 일상에 상존하는 원인 모를 공포를 미스테리하게 형상화한 부조리극 계열의 작품인 데 반해, 이 작품은 그 공포의 원인이 비교적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과 구별된다. 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이 직접적인 모티프가 된 이 작품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정치권력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권력을 확대 재생산하는 현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이 시대를 거듭하며 되풀이 되어온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작가는 문근형과 권선희의 상반된 운명을 내세워 우리 역사의 근원적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권선희의 행위는 개인적인 보복행위가 아니라 암울했던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여 기억의 공간으로 넘겨주려는, 그리하여 역사의 악순환을 멈추게 하고자 하는 역사적 교정행위이다.
권선희의 행위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역사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 그녀가 자궁암으로 죽음에 임박해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그녀의 행위는 숭고미로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끌어안고 사라짐으로써 그녀는 혼탁한 우리 역사를 깨끗이 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인과응보의 도덕률이 불통하는 왜곡된 역사현실에 직면하여 역설의 전략으로 응전한다. 역사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사의 가해자를 피해자로 반전시킴으로써 우리 역사의 모순을 날카롭게 부각시키고 이를 상징적으로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기에는 더 이상 폭력과 위협에 굴종하는 수치스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작가는 염원한다. 이현화 3기에 해당하는<협종망치>에서 역사의 아이러니와 역사 청산의 아젠다는 어느 시대에도 주제가 되고 있다. 친일잔재와 반민주잔재를 논하는 시대에 이현화는<키리에>와<협종망치>에서 진실회귀로서만이 과거와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부정적인 역사와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 권선희의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처음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순백의 영혼을 가진 백설공주’로 묘사되다가 권력의 상징인 남자 문근형으로부터 ‘엉망으로 후벼진 못쓰게 된 자궁’으로 전락하고, 다시 ‘눈먼 잔혹한 킬러’로 돌변한다. 역사적 관점이 아닌 여성관으로만 보면, 전작보다 여성의 위치가 상승된 측면이 있는 듯하다. 이현화의 여성관이나 여성의 모습이 여전히 남성과 역사의 객체로서 왜곡되어 있는지, 아니면 역사와 개인의 주체세력으로서 그 가치를 담보하고 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순수한 유미주의자로서의 이현화를 연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협종망치'의 의미를 뒤집으면 표제의 뜻이 된다. ‘꼭 협박에 의하여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협박에 의하지 않고 따른 자는 섬멸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선과 악의 끊임없는 궤적이고 따라서 개인이든 국가든 그 선행과 악행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나 권력은 없다. 그런데 역사는 선의 기록이라기보다 악의 기록이고 악을 저지른 자가 선행을 행한 자에 앞서 역사의 조명을 받는 법이다. 우리는 악을 범한 자를 문죄할 때 협박이나 강요에 못 이겨 악을 행하였으면 비교적 관대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 스스로 자청해서 악을 행사했다면 절대로 관용을 베풀지 않으려고 한다. 이현화의 <협종망치>에 등장하는 고문자는 협박에 의해 고문을 행한 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섬멸의 대상이 되는 그런 자이다. 우리는 군사독재가 들어선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 이후까지 무수하게 많은 고문자 박해자 악인들을 보아왔다. 물고문의 괴수 이근안을 비롯하여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시민을 고문 박해 살인한 자들을 열거하라 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열사들을 잔인하게 핍박한 인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나서서 갖가지 못된 악행을 다 한 자들이다. 작가 이현화가 이제 와서 또 다시 과거의 문제를 되짚어보려는 의도는 아마 '협종망치' 의 참뜻을 과거의 암울했던 시절을 보내고 나서 한 10여 년간 조용히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나니 과거를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매장하고 신세기를 살아갈 사람들의 기억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주자고 제안하여 보기 위함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또는 과거를 용서하기 위해 먼저 상대의 반성과 자숙을 촉구하려 함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벌 받아야 할 범죄자들은 숨어서 용서를 기다리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도 "더 큰 권력을 업고 기고만장해 하는 현실을 이현화는 참지 못한 것일 게다. 비유적으로 이 극에서 성고문 기술자는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데다 심지어는 총리 물망에까지 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선을 축하하는 유쾌한 웃음이 보이지 않는 선거상황실에는 다시 영원히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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