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청준 원작 남정희 각색 '낮은 데로 임하소서'

clint 2023. 9. 3. 17:22

 

 

이청준 작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실제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새빛 맹인선교회 안요한 목사다. 지난 1981년 출간된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2000년 이미 1백 쇄를 돌파하는 등 기독교 문학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돼 당시 대종상 4개 부문과 백상예술대상 3개 부문을 휩쓸기도 했다. 

이 작품은 기독교적 메시지가 너무 강하고, 실제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까닭에 평론가들에게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작품은 사실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인간의 치열한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또한 작가도 이 작품이 소설적 허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의 진실성으로 이 작품을 보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위치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다. '나'는 아버지의 신앙에 따라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 것에 반항하여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나'가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나의 자아 찾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목사인 요한은 신학 대학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휴학하고 군대에 입대한다. 카투사로 군 복무를 마친 그는 미국 본토 군사학교 교원으로 선발되자 미국에 가기 위해 서둘러 결혼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실명한다. 그는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결심하지만 그때 찬란한 광채와 함께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새로운 각성과 용기를 얻은 그는 서울역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진용과 친하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신학 공부의 길을 다시 찾는다. 그는 뉴욕 헬렌켈러 재단의 도움을 받아 고통 받는 이들의 빛이 되고자 맹인교회를 창설한다.

 

 

'소설의 극화(劇化)는 바람직하다' - 차범석

창작극의 빈곤은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온 우리 연극계의 숙제 가운데 하나다. 극단마다 번역극에만 의존하거나 관객들도 아예 창작극을 외면하고 번역극이 바로 연극의 본령인 양 착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창작극이란 반드시 극작가의 창작 희곡만을 거칭 한다는 원칙은 없다. 우수한 소설은 극화하여 연극으로서 관객과 만난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한 뜻에서 이번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공연은 매우 뜻 있는 시도라 하겠다. 그러나 소설을 극화(劇化) 하는 작업이란 얼핏 보기에는 쉬울 성싶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게 나의 체험에서 얻은 교훈이다. 극작가는 주어진 원 작가에만 충실하게 매달리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다. 즉 원작 속에 이미 인물이 있고, 시대 배경이 있고, 사건이 있고, 그리고 주제가 있으니까 그걸 충실하게만 추구해가고 정리하면 곧 희곡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왜냐면 그러한 구성요소는 소설도 희곡도 매한가지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희곡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인물, 배경, 사건, 주제 등을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설을 극화했을 경우 열이면 아홉이 원작보다 못 하다는 게 중평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가 소설적인 특성과 희곡적인 특성에 무관심했거나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희곡적이며 무엇이 소설적인가라는 근본을 제쳐놓고 오직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데 급급한 데서 생기는 병폐이다.

희곡은 들려주거나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보여 주는 행위를 그 본질로 삼는다. 배우가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지닌 인간들이 무대 위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줌으로서 관객과 공감대를 이룩하는 데 바로 희곡의 묘미가 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소설을 극화하는 경우 지나간 사건을 이야기하고 설명하는데 그치거나 말이 아닌 글(文章)로 이어진 대사를 마구 내뱉기 때문에 독자가 아닌 관객은 지루함을 면치 못하게 된다. 소설은 문장 묘사로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지만 희곡은 묘사가 아닌 하나의 행위로서, 그것도 갈등이나 대립이 수반되는 경우에 관객을 사로잡을 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극작가 남정희씨가 극화한 이청준 원작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원작이 지니고 있는 인간애와 고민과 구원의 소리가 비교적 잘 응고되었다고 본다. 신을 부정하던 지성인이 신에게 매달리고 읍소하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며 신선감 마저 풍기게 했다. 다만 욕심을 말한다면 그 구성이 다소 평면적이며 불필요한 인물의 등장으로 문제의 핵심을 좀 더 깊숙이 파고들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희곡을 읽었을 때의 소감이니 무대로 옮겨지기까지에는 젊은 연극인들의 갈고 닦는 아픔이 꼭 있으리라 믿는다. 아무튼 요즘의 연극이 천박한 상업주의(본격적인 상업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에 흐르고 따라서 레파토리 선정도 무궤도한 상황 속에서 이와 같은 맑고 감동적인 소설을 극화하려는 기획과 창조적인 의욕에 나는 박수를 아끼지 않겠다는 심정이다. 설사 기술적으로는 미약할지라도 극에 임하는 그 순수성과 실험정신이 무엇보다도 고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루 속히 낮은 데로 임하시는 그 소리와 빛과 아픔을 보고 싶다. (차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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